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로 Oct 08. 2023

21. 요양병원으로 간 아빠

"깨끗하고, 밥도 맛있게 나와요. 다들 적응 잘하니까 걱정 마세요."


우울증을 진단받고 의사에게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은 '꼭 첫째가 해야 되는 일은 아니잖아요. 엄마한테 맡기고 당분간은 아빠의 일에 대해서 관여하지 마세요. 살 사람은 살아야 되니까요.'였다. 그렇다. 나는 아빠의 삶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었다. 아빠를 면회 가는 일도, 그의 상태가 이렇게 된 이유를 추적하는 일도 멈춰야 했다. 그 모든 일들이 나에게 알게 모르게 대미지를 입혔던 것이다. 



대학병원에서는 장기입원이 불가능했다. 생각보다 아빠의 상태가 좋아지기도 했고, 3차 병원은 오랜 기간 환자를 돌보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그렇게 3개월도 채 되지 않아서 퇴원을 했다. 이 당시 엄마는 최선을 다해 아빠의 요양병원을 찾았다. 조현병환자를 받아주는 요양병원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는데, 딱 2군데가 가능하다고 했다. 퇴원을 시키고 이송할 때는 보호자의 사인이 필요하다.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정신과는 스스로 퇴원 절차를 밟을 수 없고, 법적 보호자의 동의가 꼭 필요하다. 


아빠와 떨어져 산지 꽤 시간이 흘렀을 때, 동생들은 대학교를 가야만 했다. 아무리 국립대학교를 갔어도 둘을 한꺼번에 등록금을 내기에는 엄마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아빠에게 전화하여 사정을 하였다. 이혼해 달라고. 애들 대학교는 보내야 되지 않겠냐고. 그 시절에는 국가장학금을 한부모가정에게 많이 지원해 줬다. 아빠는 엄마와 함께 사는 조건과 양육비는 주지 않는 조건으로 이혼 도장을 찍어줬다. 덕분에 동생들은 국가장학금을 받고 다닐 수 있었고, 함께 사는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갑자기 왜 이혼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엄마는 법적 보호자가 아닌 것이다. 엄마는 이혼을 했기에 남이었고, 아빠의 법적보호자는 나였다. 아빠에 관한 일처리를 할 때 내가 없으면 모든 것이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이다. 최대한 아빠에게서 멀어져야 했지만 멀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병원에 가 아빠를 퇴원시키기 위해 사인을 했고, 요양병원에 입소시키기 위해 사인을 했다. 그러니 아빠를 계속 봐야 했다. 참으로 다행은 아빠가 사람처럼 하고 있었다. 대학병원에 있을 때 머리도 잘랐고, 수염도 깨끗이 밀었다. 세수, 양치, 샤워 등은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이미 하고 있는 상태라 위생상태는 훌륭했다. 처음 아빠를 보았을 때는 야생의 상태였으나 지금은 도시의 아픈 사람이었다. 물론 예전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당시 50대 중반이던 아빠는 꼭 80대 할아버지 같이 손이 쪼글거리고 온몸의 피부는 늘어졌으며, 볼이 움푹 파여있었다. 



정신이 아픈 사람들이 모여있는 요양병원에 갔을 때 순간을 잊지 못한다. 오줌지린내와 약품 냄새가 진동을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는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 성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간호사들은 방으로 들어가라고 다독였다. 아빠의 사복을 요양병원의 옷으로 갈아입히고, 아빠 자리를 찾아 물품을 정리해 주었다. 4인이 같이 쓰는 방이었는데, 나머지 3명이 아빠가 온 것이 신기한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요양병원의 요양사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50, 60대였는데, 꽤나 친절하였다. 


아빠는 다행히도 집에 가자고 조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엄마와 나는 아빠에게 손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아빠는 새하얗게 깡마른 손을 들고 한참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오겠다며 애써 눈물을 참고 내려갔다. 그장면이 내게는 너무 생생하게 남아있다. 꼭 어린애를 물가에 내놓고 온 기분이 이런걸까 싶을 만큼 불안하고 안타깝고 마음이 저려왔다. 그리고 자책감이 너무 몰려왔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닌데. 너무 애석하게도 그 뒤로 아빠를 볼 수 없었다. 코로나가 터져 모든 면회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 마지막일지 누가 알았을까. 


아빠는 그 요양병원에서 잘 생활하며 연주도하고, 레크리에이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2년 차쯤에는 종종 새벽에 몽유병처럼 일어나 자꾸 사람을 때리는 바람에 요양병원에서 쫓겨났다. 받아주는 곳이 없어서 애를 먹었는데, 겨우 받아주는 한 곳을 찾았다. 그러나 3년 차쯤에 몸이 급격하게 안 좋아져서 연계된 병원으로 이송되어 온갖 검사를 다 받아야 했고, 한 번씩 보호자 신분으로 내가 가야 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그러나 나는 아빠를 만날 수가 없었다. 집단생활을 해야 하는 아빠를 사회생활을 하던 내가 접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코로나는 죽음을 맞이해야만 아빠와 나를 마주할 수 있게 했다. 

이전 21화 20. 우울증 진단을 받은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