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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로 Oct 09. 2023

22. 죽음을 맞이한 아빠

"마지막으로 인사 나누세요. 9시 45분 사망을 선고합니다." 


추석 명절 연휴가 시작되었다. 동생들도 기차를 타고 엄마 집으로 내려가고 있었고, 나도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톨게이트를 지났을까. 갑자기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차 돌려서 다시 병원으로 가라고. 동생들에게도 기차 중간에서 전부 내리라고 했단다. 엄마도 기차를 타고 가고 있으니 조금만 가서 기다리라고. 이게 무슨 일이지, 당황한 가운데 다시 차를 돌려서 병원으로 향했다. 


내가 취직한 지역에 아빠 병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먼저 도착했다. 아빠는 응급실에 있었다.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었으며, 전기충격으로 심장은 뛰고 있었다. 그리고 링거로 심장을 뛰게 하는 수액을 맞고 있었다. 한참 아빠를 바라보았다. 이제 아빠가 갈 준비를 하고 있구나. 온몸이 떨려서 아빠를 만질 수가 없었다. 보지 못한 사이 아빠는 흰 수염이 듬성듬성 보였고, 머리는 새까맣고 빡빡하게 자라있었다. 


엄마와 동생들이 도착했다. 엄마는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으니 아빠에게 할 말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 손을 한 번씩만 잡아주라고 했다. 내가 처음으로 다가갔는데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남동생이 이야기를 하고, 여동생이 이야기를 한 후에 엄마까지 마치고 나서야 겨우 아빠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아빠의 손은 아직 따뜻했고, 뼈가 만져졌다. 이렇게 애틋하게 누군가의 손을 잡아본 적이 있었는가. 아빠의 귀가에 이야기했다. 


'그동안 사느라 너무 고생했어. 나도 살아보니까 힘들더라. 정말 사느라 고생 많았어. 거기서는 아프지 마.'


어른에게 고생했다, 수고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초등학교 예절시간에 배웠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당신의 50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세월을 온전하게도 아닌 아픈 정신을 붙들고 사는 게 정말 고생스러웠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사회생활을 하고 누군가와 결혼을 계획하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제정신에 바둥거리고 있는데, 지금 나 자신도 온전히 살아가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인데 말이다. 그런데 아빠는 어땠을까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아빠는 그날 바로 죽고 싶지 않았나 보다. 계속 맥박이 잡히는 바람에 사망선고는 불가능했다.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이러다가 기적적으로 아빠가 살아나는 건 아닐까 하는 작은 희망도 있었다. 중환자실에는 보호자가 들어갈 수 없어 이틀 동안 동생들은 엄마집으로 갔고, 나는 자취방에 돌아가 상황을 기다렸다. 3일째 되던 아침 9시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병원으로 가보라고. 


나는 이번에는 병원에 혼자 들어가지 않았다. 혼자 들어갈 자신이 없어 가족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음속에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감정은 쉽지 않았다. 의사는 가족들이 오실 때까지 산소호흡기를 떼지 않았다고, 어서 인사드리라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정지는 이미 왔고, 산소호흡기 때문에 폐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 뿐이었다. 수많은 감정들이 흘러갔다. 역시나 나는 아빠에게 고생했다고 말했다. 


차가운 아빠가 수의를 입고 차가운 스테인리스 침상에 누워있다. 정말 마지막 가는 길이다. 사람이 이토록 차가워질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손과 발은 수의로 잘 감싸져 있었으나 귀는 보였다. 귀가 끝부터 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죽는구나. 아빠의 검은 머리칼을 한번 만져보았다. 부디 그 곳에서는 따듯하게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빌어주었다. 




이 글을 가장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가 액체가 되어 저 밑으로 흘러갈 것 같다. 지독하고 아주 경멸스러운 자본주의 끝을 경험한 장례산업을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장례를 치러본 모든 이들은 아주 잘 알 것이다. 지리멸렬한 심정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가는 사람은 말이 없다. 남은 사람이 안타까워 좋은 수의, 좋은 관, 좋은 납골함을 선택할 뿐이다. 모든 것이 등급화되어 있고, 절차 하나하나에 돈이 붙는다. 


아빠의 장례식을 하지 않았다. 코로나 상황인 것도 있었고, 올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할아버지, 고모와 작은 아빠들에게 연락했지만 모두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아빠가 마지막까지 고모가 써준 편지를 들고 있었기에 그래도 고모에게는 꼭 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고모는 매몰차게 말했다. '내 아들 곧 결혼하고 해외로 유학 가야 해. 부정 타서 안돼.' 다시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당신의 아들, 남동생, 형이 죽었다. 


나는 엄마와 여동생과 있으면서 마음을 다독였다. 그 와중에 남동생은 여자친구가 왔다며 아빠가 돌아가신 당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동생에게 오늘은 가족끼리 함께 있는 것이 어떻겠냐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우리를 무시하고 나갔다. 꼭 오늘 같은 날 남동생은 나갔어야 했을까, 가족과 함께 있었을 수는 없었을까. 너의 아빠가 죽었다. 


모든 것이 기가 막힌 하루였다. 아빠가 죽음을 맞이한 그날까지 가족이란 대체 무엇인가를 던져주고 갔다. 그가 선택하지 않았던 가족과 그의 선택으로 만들어낸 가족이 뒤엉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로 빨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원가족들도 그가 일군 가족들도 내게는 모두가 실망스럽고, 불편한 존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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