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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은 Aug 05. 2024

폭우 내 심장의 변죽을 울리다.

침묵은 소리 없는 아우성

지난봄에 고향에 가보려고 하다가 못 내려갔다.

선배가 지역국회의원에 당선이 되어

축하도 해드리고 친구들 얼굴도 보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다.

기독교 사립 명문고로 교복에  학교배지를 부착하고

학교 정문을 나서면 나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종종 주말에는 버스를 타고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갔었다.

버스 안에서 인근학교 예쁜 여고생들을 만나면 설레고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버스정류장 근처에 자취를 하는 친구의 집에 찾아가면

할머니와 딸들이 나를 안아주고 좋아했다.


여름날 하루  비가 억수 같이 내려  기숙사에 머물까 고민을 하다가 집에 다녀오기로 했다.

왜냐하면 엄마의 구수한 된장국을 먹고 와야 힘이 났기 때문이다.

지금은 엄마의 음식에서 아내의 음식으로 바뀌었다.

기숙사 밥도 맛나지만 가능하면 주말은 집으로 갔다.

길가에 피어나는 빨강 노랑 예쁜 꽃들과 들판의 곡식들이 자라는

청초한 자연을 느끼며 아름다운 청춘의 기쁨을 누렸다.


나는 그 당시 비를 맞는 것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버스가 폭우 속을 뚫고 길을 가던 중 버스 기사님께서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도로에 산사태가 발생하여

더 이상 운행할 수 없으니 승객 모두 하차를 해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승객의 대부분은 학생들이었다. 버스에 내려 2km 정도 초등학교 앞 지름길로 걸어가는 방법을 생각했고

폭우에 강물이  넘실 거리를 다리를 가로질러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용기 있는 남학생들이 앞장을 서고 여학생들이 뒤따라 갔다. 나는 맨 후미를 지키며 따라갔다.


폭우, 내 심장의 변죽을 울리다. 침묵은 살고 싶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다리의 중간쯤 지날 때  이미 강물이 사람 키 높이로 다리를 덮치고 있었다.

무서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후미 지킴이라고 했지만 앞에 가는

여학생 꼬리를 그냥 따라가는 나약한 남학생에 불과했다.


그런데 비바람 폭우 속에서 사람의 형체도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내 뒤에서 한 여학생이 내 이름을 불렀다.  

분명히 우리 일행은 다 지나갔는데

내가 맨 마지막이 분명한데 누가 나를 불러 두려웠고

심장이 내려앉았으나 귀신이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뒤돌아 보았다.

그런데 마침 내가 아는 친구였다.

초등학교 짝지가  폭우 속에서 다리 중간쯤에

비에 흠뻑 젖은 채로 울고 있었다.

너무 경황이 없어 아무 말없이 불안해하는

그를 안아주고 손을 잡고 다리를 무사히 건너왔다.

나는 그때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폭우 속에 그 친구가 거기에 있었는지


몇 년 후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우연히 그 친구를 다시 만났고

그녀가 에피소드 하나를 이야기해 주었다.

학교 다닐 때 내가 까칠한 남자였다고 한다.

증거로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내가 책상 가운데 라인을 넘어왔다고 연필로

무지막지하게 찍어 자기 손바닥에 상처가 났다고

그래서 내 이름은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철이 없을 때

일이라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 이후 우리는 무척 가까워졌다.

각자의 습작시를 이야기하고

톨스토이의《죄와 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등

마치 문학을 좋아하는 청년처럼 이야기한 것  같다.

귀여운 그녀의 집에 초대받아 냉장고 안에서 꺼내준

달콤한 복숭아 백도를 맛보고 복숭아가 천국의 맛인 줄 알았다.

그 당시 집에 냉장고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부잣집이었다.


세월이 흘러 각자 다른 대학으로 가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내 경험상 인연은 그립다고 반드시 만나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생각을 피하고

같은 하늘 아래서 마음속으로 함께 걸어가는 숲의 고요한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울 송파에 살고 있다는 정도만 소식을 듣고

친구들에게 가끔 안부를 물어 보았지만 만나지는 않았다.

그녀의 꿈도 시인이라 책을 통해서 마주하거나

행여 다시 만나게 된다면 예의를 갖추어

내 삶을 아름답게 그려가는 사랑의 시집 한 권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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