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쌀밥에 고등어 반찬 아니야?
나에게 생선 요리는 그런 것이었다. 등 푸른 생선을 많이 먹어야 두뇌에 좋다며 고등어를 구워 주시던 어머니의 손길이 담긴 요리.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을 숟가락으로 봉긋하게 떠올린 다음 살살 발라낸 고등어 한 점을 올려 한 입에 쏙 먹는 것. 구운 고등어의 짠맛이 입 안을 가득 메우면 흰 밥이 재빨리 짠맛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그런 조화로운 맛의 향연. 혹은, 아예 굽지 않고 회로 떠서 먹거나 고슬고슬한 밥 위에 날생선을 얹은 초밥, 아니면 얼큰하게 국물을 끓여 탕으로 먹는 것. 이탈리아에 오기 전, 내가 아는 생선 요리는 그런 것이었다.
피시 앤 칩스(Fish and chips)는 들어봤는데
피시 앤 브래드(Fish and bread)라니?
우리 드림팀은 슈퍼바이저 P의 생일을 기념하여 회사 근처 레스토랑을 찾았다. 우리는 예약된 테이블에 앉았다. "여기는 내가 베네치아에서 사랑하는 레스토랑 중 하나예요. 혹시 바깔라(baccala) 먹어봤어요?" 생전 처음 듣는 이탈리아어였다. "그럼, 식전 요리로 바깔라(baccala)를 먹어보는 거 어때요? 대구를 소금에 절인 이탈리아 전통 음식인데 빵 위에 얹어서 나와요. 정말 맛있어요! 식전 요리로 딱이에요." 간단하게 설명을 마친 P는 바로 주문부터 했다. "저희 식전 요리부터 주문할게요. 와인하고 바깔라 4개 먼저 주세요." 내 귀를 의심했다. 바게트 빵 위에 생선을 얹어서 먹는다고?
베네치아는 해산물 요리가 유명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식전 요리로 빵과 생선을 함께 먹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식전 요리로 절인 생선 그 자체를 먹었던 적은 있었는데. 영국에서 먹었던 피시 앤 칩스(fish and chips)처럼 빵과 튀긴 생선을 따로 주는 건가? 베네치아에 와서 생활비를 아껴 쓰느라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서 식사 한 번 못했던 나는 이 곳에 온 지 한 달이 넘어서야 베네치아만의 식전 요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빵 위에 물고기
바깔라의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사선으로 무심하게 자른 바게트 위에 하얀 크림치즈를 발라놓은 모습이었다. "하얀 게 바깔라예요. 먹어봐요." 내가 좋아하는 맛은 아닐 것 같다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빵을 들어 올려 한 입 베어 물었다. "음.." 아무래도 너무 적게 먹은 듯했다.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음? 맛있네?" "베네치아에서는 치케티(cicchetti)라고 하는데 납작하게 자른 빵 위에 여러 재료를 올려서 먹는 요리예요. 베네치아에서는 바깔라를 비롯해 여러 가지 생선으로 만들어요. 이따가 나가면서 진열장을 봐봐요." 엄청 비릴 것 같다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먹으면 먹을수록 고소한 맛이 꽤나 중독성이 있었다. 대구를 소금에 절인 건데 비린 맛도, 짠맛도 강하지 않았다. 우유를 넣고 쪄서 그런지 식감도 보들보들하고 맛도 담백하니 부드러웠다. 순식간에 빵 한 개를 다 먹었다. 기분이 좋아지는 식전 요리였다. "와인이나 맥주랑 같이 먹어도 좋겠다!" "응! 리지야, 마트에 가면 바깔라를 팔더라고. 나는 그거 사서 크래커에 얹어서 먹는데 단백질도 많고 저녁 야식으로도 딱이야." 동료 J는 다음에 마트에 가면 내게 보여주겠다고 했다.
P의 말대로, 레스토랑의 진열장에서는 더 놀라운 비주얼을 발견했다. 생선이 통째로 얹어진 빵이 진열장에 가득했다. 두 눈을 감았다 떠봐도 은빛의 생선이다. 알고 보니, 우리처럼 식전 요리로만 먹는 게 아니라 와인과 곁들여 먹는 음식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와인을 마시는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간단한 점심을 먹을 때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에 잠시 바(bar)에 들러 와인을 마신다. 보통 저녁을 8시쯤부터 먹기 시작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저녁 시간 전인 오후 5시부터 8시까지를 해피 아워(Happy hour)라고 한다. 이탈리아어로는 아페리티보(Aperitivo). 저녁 식사 전, 와인이나 와인으로 만든 칵테일 스피리츠(spritz)를 마시며 식욕을 돋운다. 이때 치케티를 함께 곁들이면 최고의 조합이다. 치케티(cicchetti)는 빈 속에 와인을 마시기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안성맞춤 안주였다. 쉽게 말하면, 와인과 함께 먹는 핑거 푸드(finger food)인 것이다.
라자냐에 생선
다음날 점심시간, 나는 이 레스토랑을 다시 찾았다. "이게 뭔가요?" 진열장에 있는 생선을 가리키며 물었다. "앤쵸비와 블루베리를 곁들인 치케티에요. 하나 드릴까요?" "네. 그리고 다른 메뉴도 하나 추천해주실래요?" 점심시간이면 진열장에는 다양한 종류의 치케티를 비롯한 간단한 핑거푸드가 가득하다. 셰프가 주방에서 만들어주는 음식 말고도 몇 가지 메뉴를 골라서 먹을 수 있다. 고른 음식은 직원이 접시에 담아 그램 수 혹은 새우 몇 마리 이런 식으로 계산해준다. 아무래도 하나만 먹기엔 배가 고플 것 같아 직원에게 메뉴 하나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우리 레스토랑에서 인기 있는 메뉴 중 하나인 피시 라자냐(fish lasagna) 어때요? 아주 맛있어요." 직원은 영어로 설명을 하려다가 막힌 듯, 아주 맛있다는 말과 함께 빙긋 웃었다. 직원을 믿어보기로 했다. "네, 라자냐도 같이 주세요."
음식이 나오고 앤쵸비부터 먹었다. 새콤한 블루베리 소스와 앤쵸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어울렸다. 강한 맛은 아니지만, 입맛을 돋우기에는 충분히 상큼한 맛이다. 이제까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맛이다. 하나 더 먹을까 하다가, 마음을 정리하고 라자냐의 가장자리를 포크 옆면으로 잘랐다. 오븐에서 구운 라자냐는 겉표면에 포크를 댈 때 살짝 '바사삭-'하고 소리를 냈다. 라자냐 안쪽은 굉장히 촉촉했다. 우유와 크림이 들어갔지만, 그들보다는 생선 육즙 그 자체가 입 안에 가득했다. "맛있다... 맛있다, 맛있다!" 생선 살을 통째로 먹기보다는 으깨진 생선을 먹는 것 같이 부드러웠다. 그저 맛있다는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 뒤로, 나는 행복해지고 싶을 때 이 라자냐를 찾았다.
파스타에도 생선
"내가 우리 집 하우스메이트한테 배운 건데 진짜 맛있더라. 브로콜리 앤쵸비 파스타야(brocoli anchovy pasta). 한 번 먹어볼래?" 어느 점심시간, 요리에 탁월한 감각이 있는 나의 한국인 동료 G는 베네치아 현지인에게 로컬 푸드를 배웠다며 내게 권했다. 빵과 생선을 같이 먹는 것을 넘어 파스타도에 생선을 넣는다니! 홍합, 조개류의 그런 해산물 아니고 물고기! 이것을 먹어볼지 말지는 또 다른 도전이었다. 앤쵸비라면 멸치인데, 우리나라에서 물엿에 꾸덕꾸덕하게 볶아서 먹는 그 멸치를 파스타에 넣어서 먹는다니 도대체 무슨 맛일까. "한국에서 볶아서 먹는 그런 멸치야? 그 멸치를 산 채로 가져왔어? 어떻게?" 앤쵸비는 소금에 절여 병에 담겨 있었다. "이걸 파스타에 넣는다고?" 내 의심을 뒤로하고 능숙한 솜씨로 브로콜리를 삶은 뒤 앤쵸비와 함께 팬에 넣고 으깼다. "맛이 없으면 생선만 골라놓고 먹으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겠는데?" 마치 볶음밥에서 당근을 골라내려는 격이었다.
소스처럼 면과 함께 붙어 있는 브로콜리와 앤쵸비는 생전 처음 보는 파스타였다. 포크를 들고 과감하게 면을 집어 입에 넣었다. "오! 맛있다!" 비린 맛은 전혀 없었다. 생선이 들어간 것 같은데 그렇다고 살코기가 씹히는 것은 아니었다. 잘게 다져진 브로콜리와 함께 부드럽고 깔끔한 맛이었다. 레스토랑이 아닌 엄마가 집에서 해주는 파스타 같았다. "이렇게 맛있을 줄 알았으면 사진을 찍어둘 걸..." 그 뒤로 레스토랑에 갈 때마다 메뉴판을 둘러봤지만, 앤쵸비 파스타는 찾을 수 없었다.
'원래 그런 것'은 없다
생선으로 만든 식전 요리부터 파스타에 라자냐까지, 베네치아는 각종 해산물로 만든 요리로 가득했다. 내가 알던 '그런 것'은 없었다. '생선은 이렇게 요리해야지'라며 먹어보지 않았다면, 다양한 생선 요리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베네치아'하면 가장 생각나는 음식을 고르자면 바깔라(baccala) 치케티와 피시 라자냐(lasagna)다. 지인들이 베네치아에서 어떤 음식을 먹어야 되냐고 물으면 이 두 가지를 추천한다. 특히, 생선이 얹어진 치케티는, 생전 처음 보는 비주얼에 흠칫 놀라긴 하지만, 한 입 먹으면 의심했던 표정이 싹 사라진다. 저녁을 먹으러 가야 하는데 "하나만 더 먹자!"라며 다른 생선이 얹어진 치케티를 주문해 발길을 묶어둔다. 우리는 와인을 곁들이며 겉모습으로 편견을 갖지 말자고 또 한 번 다짐한다. 예전에 먹었던 고소한 생선 라자냐를 떠올리며! 보나 노떼(Buona notte, 굿 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