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달한 고구마 라떼, 재밌는 삶

by cheh

-선생님, 어떻게 하면 책을 좋아할 수 있나요?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 돼요.

모임에서 읽기로 해서, 웃어른이 추천해서, 당장 오늘내일의 업과 관련이 있어서 필요한 책들을 빌리러 갔다. 저녁 6시가 넘은 도서관에는 야근 중인 사서 한 분만 대출 데스크에 앉아 턱을 괴고 본인의 독서에 푹 빠져 자리를 지켰다. 대출 가능이라고 뜨지만 서가에 없는 책 1권 때문에 자동 대출기가 아니라 사서 선생님께 말을 건네며 겸사겸사 용기 내어 건넨 질문에 상대방은 대답을 해주었고, 몇 초 뒤 눈을 반짝이며 본인에게 재밌었던 책을 추천해준다.

마침 오늘따라 주문한 음료는 달달한 고구마라떼, 생업의 무거움에 더하여 추천받은 책을 얹어 내 자리로 돌아왔다. 제깍제깍 반납하지 못하고 더블-업된 책이 여럿인데 거기에 욕심을 더하여 또 많은 책을 빌리니 내 욕심을 남에게 들킨 것 같아 조금 부끄럽기도 하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찾느라 또 추천받은 책들을 살펴보느라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니, 텀블러 안의 고구마라떼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다.

공부를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 첫 알파벳 공부를 시킬 때 꿀로 글씨를 써서 맛보인다는 유태인처럼 고구마라떼를 앞에 두고 책을 읽고 글을 써본다. 어제는 속세에 얽혀 힘들다며 잠이 들어놓고는, 오늘은 속세에 얽힌 인연 덕분에 설레 하고 있다. 이렇게 들쑥날쑥해도 괜찮은 걸까, 내 기분.


그렇게 밤 9시 무렵, 빌린 책 몇 권을 들고 집에 다다른다. 철컹철컹 지하철 안에서 휘청이는 몸에 균형을 잡으면서, 글쓰기에 재미를 붙인 남편을 위해 빌린 책과 나를 위해 빌린 책과 업을 위해 필요한 책들을 낑낑 들고 집에 왔다. 그리고 다시 1시간여의 줌 미팅이 끝나고 고객님이자, 갑이자, 웃어른의 작업 요구를 다시 반영해서 1시간 가량의 시간이 흐른 뒤- 제설 작업 후의 기분을 맛보며 남편에게 하소연을 하러 갔다. 남편은 불도 못 끈 채 자고 있었고 하소연할 곳을 잃은 나는 부적인 에너지를 돌리려 오늘 빌려온 책을 집어 들었다.

2020년 11월에 출판된 책, 아마 도서관에 들어온 지는 얼마 안되었을 책, 누군가의 추천으로 짚어 들게 된 책을 들고 표지와 목차를 살펴보니 한강변 버드나무 아래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마도 작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새 책 특유의 한 번도 접히지 않은 빳빳한 질감의 느낌과 도서관 책답게 붉고 크게 찍힌 도장이 멋있다는 생각을 한다. 핑크색 자몽맛 사탕을 입에 넣고, 엎었다 뒤집었다 하는 고객님의 요구를 반영하고 또 반영하느라 1시간 동안 엎었다 또 1시간 동안 뒤집는 작업을 한 스스로를 달래 본다.

평화롭게 잠든 남편의 규칙적인 숨소리에 맞춰 이 감정을 어쩔 줄 모르는 작업자의 에너지로 토닥토닥 키보드 자판을 두드린다. 학교종이 땡 하고 제시각에 종을 치는 것처럼 칼같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던 남자 친구에게 서운해하던 어린 날의 나는 약속을 못 지킨다는 것에 대해 한층 너그러워지게 되었다. 첫 번째 했던 말은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존경해 마지않았던 웃어른조차 엎었다 뒤집었다 말을 바꾸시는구나-

인간에 대한 포용력이 또 한층 넓어지는 삼십 대의 어느 봄밤이 지나가고 있다. 세상에 대한 불신이 세상에 대한 기대 절하로 사라지고 있는 밤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 수 있을까, 스릴 넘치게 살면- 어느 정도 적당히 긴장하면서 살면 될까. 어떻게 하면 삶을 좋아하게 될까, 삶을 재밌다고 여기면 될 터였다. 눈 앞에서는 비극이라 생각했는데, 멀리서 보니 내 삶 참 어이없고 웃기네. 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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