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친딸', '엄친아'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신종어가 된 것은 남의 집 딸을 부러워하는 엄마들이 많아서 였을 것이다. 그런데 남의 집 딸만? 사실 남의 집 남편도, 남의 집 엄마나 아빠도, 때때로는 남의 집은 딱 '나 같은 사람'조차 부러워 하곤 했지 않나. 쉽게 말해 나 스스로도 나보다 남의 처지를 부러워 했다는 이야기다.
신기한 건 남의 집 할머니는 별로 부러워 하지 않았다는 점. 아기들이 다 똑같이 생긴 것처럼,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다 비슷하게 생겨서(밀라논나에 따르면 70대 넘으면 외모가 평준화가 되어서) 별로 안 부러웠다기보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내게 주는 영향이 딱히 없어서 그 영향을 비교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우리집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나와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기에는 몇분은 너무 빨리 돌아가셨고, 다들 너무 멀리 살았고, 무엇보다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나에게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나도 그랬다.
그러나 나의 조손관계와 모녀관계는 달랐다. 나의 엄마에게는 나라는 딸래미가 중요했고 나에게도 그녀가 굉장히 소중한 존재인 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바라는 것도 많았고 상처도 많이 주고받았다. 물론 지금은 서로 어느정도 성숙해졌고, 육아의 관계보다는 성인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관계가 되었기도 해서 많이 편안해졌다. 편안해지는 데 결정적인 건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엄마가 옆집 아줌마처럼 혹은 옆옆옆옆.....옆옆 집 아줌마처럼 나에게 무언가를 해줬다면"에서부터 시작하는 슬프고 괴로운 상상으로부터 이제는 어느정도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요즘은 오히려 1년 전의 내가 뭔가를 했더라면, 이라는 자기책임의 가정이 더 많아졌다.)
얼마 전 엄마가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너 주워 왔다'고 진짜 엄마 찾아 가라고 나를 놀린 적이 있었다. 애기 때였다면 당황과 놀라움과 어쩔 줄 모르며 쩔쩔매고 겁먹고 울었을 상황이, 서른이 넘어서 펼쳐지니 새로운 경험이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제 와서?"였다. 두 여자가 서로 엄마와 딸로 만나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혹은 평생을 함께 보냈는데 이제 와서 새로운 여자와 모녀관계로 또 만나서 지금껏 해온 것처럼 지긋지긋하게 지지고 볶고를 또 하라고? 그리고 두번째 드는 생각으로 인한 나의 반응은 눈물이었다. 펑펑 울었다기보다는 서러움에 눈물이 찔끔 고였다.
첫번째로 든 생각을 정의하자면 진짜 엄마가 따로 존재하는 미래에 대한 상상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생각과 반응의 정의는 엄마와의 과거에 대한 반추, 그리고 원망이었다. 우리가 딸로, 또 엄마로 살아 온 세월이 얼마고 또 지금처럼 원만하게 살기 위해서 얼마나 서로 고생하고 열심히 살았는데 갑자기 그 모든 게 부정당한 것 같은 생각에 눈물이 찔끔 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되돌아봄 뒤의 감정은 '꿈에 그리는 엄마'와 '30여년을 같이 산 엄마'와의 괴리에서 오는, 엄마가 나에게 못해준 것들과 그것으로 인해 생긴 내 삶의 한계에 대한 원망이었다.
할머니가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더라면 내 삶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떤 할머니가 와도 내게 준 영항력은 그닥 크지 않았을 것 같아서 비교가 덜 되고 덜 부러웠다. 그러나 주양육자의 경우는 다르다. 내가 어떤 부모를 만나고 어떤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내 삶은 정말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정과 상상은 어쩌면 내 감정의 숨겨진 뿌리이고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서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트리거가 되어 뜬금없는 자기연민을 발동시키곤 한다.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변하기 위해 용쓰고 애쓰던 20대가 지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부모 잘 만나 좋은 대학과 직업을 남들보다 쉽게 쉽게 갖는 딸들이 아직도 많이 부럽다. 다행히 서른이 넘어가면서 부모의 영향보다 어제의 내가 현재의 내게 준 영향이 더 커지고 있기에 극복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이제 부모와의 인연보다 나 스스로로 인한 인연이 더 커진 셈이지.
유튜브를 하면서 남의 엄마는 관심 밖이었는데 좋은 말씀 전해주는 남의 할머니는 관심 안에 있었나보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에게 할머니 한 분을 추천해주더라. 그 할머니는 나를 모르고 관심도 없겠지만 유튜브 특성상 나는 그 할머니의 정선된 생각과 말들을 쏙쏙 흡수하고 있다. 처음 할머니는 자기 일상을 보여주더니 하도 할머니한테 인생 상담하는 댓글 손녀들이 많았는지 아예 술집 테이블에 앉아서 상담을 해주기 시작했다. 논나의 아지트라면서. 그리고 독한 술처럼, 관계를 폐기하라는 쎈 용어를 들으니 '시절인연'이라는 물 흐르듯 곱고 연한 단어가 생각났다. 시절마다 이어지고 사그라드는 인연에 대해, 이제는 더이상 인연들에 대해 용쓰지 않는 서른 넘은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내 친구들에 대해서. 그리고 가족이라는 인연에 대해서.
옛 친구들에 대해서는 가끔은 잘 있나 궁금하기도 하지만 옛 애인에게 연락하는 건 실례인 것처럼, 이제는 나와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그저 한때 알고 지냈다는 이유로 갑잣스레 연락하는 건 덧없는 짓인 것 같다. 우리는 더이상 즐겁게 얘기하며 시간을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같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나를 더 힘들게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문득 문득 떠올리고 잘 지내기를 또 잘 되기를 빌고 마는 게 서로에게 최선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나를 살게 하는 것이므로, 내게 생기를 불어 일으킬 수 없는 관계를 이어가려고 매달리는 건 사랑이 아니고 집착이니까. 자연스럽게 기다리고, 주어지면 노력하고, 안되면 너무 연연하지 말고. 꼭 남하고만 사랑하지 말고, 안되면 내 인생하고 사랑하고 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