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기다림, 하룻밤 수프

by cheh

무얼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 하루 이틀 동안 지속될 수도, 몇 달간 계속될 때도 있다. 나에게는 요즘이 그런 때인 것 같다. 벌써 2주째 평소의 내 컨디션으로 못 돌아오고 있다. 자꾸만 잠이 늘고, 무얼 해도 망한다. 목요일 아침, 며칠 만에 청소기를 돌리고 세탁기를 돌리고 집안 점검에 나섰다. 요 근래에는 며칠 바쁘고 다시 이틀 여유로운 날들이 반복되었는데, 목요일이 그랬다. 세탁기를 돌리면서 냉동실에 오래 보관되어 있던 단호박 덩어리를 꺼내 수프를 만들기로 했다. 저번 날 바질 페스토 샌드위치를 만들고 남은 빵 쪼가리를 맛있게 먹기 위해서 나름대로 밥을 대신할 수 있도록 양파를 잔뜩 넣고 만들었다. 실패하지 않던 수프인데, 막 끓여서 맛을 보니 실패했다. 치킨 스톡을 너무 많이 넣었던지 맛이 썼다. 맛없는 걸 남을 줄 수 없으니 얼른 한 그릇 먹어 치우고, 빨래를 널려고 보니 비가 내린다. 요리도 망했고, 빨래도 망했다.

하염없이 거실 코타츠 속에서 누워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깼다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남편은 늦는다고 하고 마침 엄마도 저녁을 아직 안 먹었다 하여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시라 초대를 했다. 남편과 함께 먹으려고 뜨거운 물에 불려두었던 곤드레 나물은 흙먼지 알갱이가 손가락 끝에 안 느껴질 때까지 여러 번 씻고 또 씻어 밥 위에 앉쳤다. 반찬은 별거 없지만 대파와 마늘을 곱게 다져서 간장과 참기름을 듬뿍 넣고 간장 양념장을 만들었고, 엄마가 준 목살을 매매 구워서 엄마가 준 김치와 함께 내어갔다. 별로 어렵게 만들지도 않은 간단한 나물밥인데 엄마는 맛있다며 몇 그릇을 다시 채워서 먹었고, 다행히 늦게라도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남편 몫으로 남겨둔 고기와 밥을 챙겨 먹일 수 있었다. 오늘따라 모든 시도들이 망한 것만 같고 내 입맛에는 그다지 훌륭하지 않은데, 엄마도 남편도 맛있다고 칭찬을 하며 행복하게 밥을 먹어 주었다.

다음날, 엄마도 남편도 없는 집에서 혼자 이런저런 할 일들을 남겨놓은 채 여전히 거실 코타츠에 누워만 있었다. 도무지 일을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일부러라도 먹어야 한다고 마음먹고, 전기 밥 속에서 열몇 시간째 보온 중인 곤드레 밥을 꺼냈다. 프라이팬에 참기름을 두르고 앞뒤로 매매 곤드레 밥을 눌어 누룽지를 만들었다. 절반만 먹으려 했는데 먹다 보니 몽땅 다 먹어버렸다. 참기름과 김, 거기에 양념장까지 얹어서 먹고 또 한숨을 자버렸다. 어쨌든 오늘 밤에는 끝내야 하는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밤 10시가 되기 전에는 끝내야지 하던 일들이 아직도 한참 남았더란다. 어쩔 수 없지, 오늘 밤도 새워야겠구나 하면서 맛없던 단호박 수프를 먹어치우려고 뚜껑을 열어 맛을 보니. '오? 맛이 있다?' 내가 배가 고파서 맛이 있는 걸까, 시간이 지나서 맛이 배어든 걸까. 치킨 스톡의 씁쓸한 맛이며 양파의 매운맛은 다 사라지고 부드러운 맛만 남았다. 식사용 수프가 되어버린 단호박 수프에 남은 쪼가리 빵을 잘라서 함께 먹었다. 맛있는 걸 먹고 나니 다시 힘이 난다.

때로는 시간이 필요한 것도 있는데, 내가 너무 마음이 급했구나. 믿고 기다리면 되는데 내가 너무 조바심을 냈구나. 수프를 탈탈 긁어먹으면서 요 근래의 스스로를 다시 생각해본다. 어쨌든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면서 기다리면 되는데 나는 나를 못 믿고 제풀에 지쳐 아예 손을 놓아버리려 했구나 싶다. 나에게 다행스럽고 또 함께 하는 남들에게 민폐가 되었을지 모르는 그 지난 2주간 내 손을 놓지 않아 준 건 과거의 내가 만들어 놓은 장치들이었다. 절대 쉬지 못하게 그래도 꾸준히 무언가를 해낼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장치들이 내 멱살을 잡고 하드 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미래의 나를 위해서 오늘의 나는 물을 끓여 루이보스 티를 유리병 가득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또 내일의 내가 좀 덜 부끄러울 수 있도록 작업을 시작한다. 오십몇쪽의 문서가 거의 2배로 불어나기 전에는 끝날 수 없는 작업. 이틀간 미루고 쉬었으니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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