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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철현 May 21. 2021

어느 노부부를 보며

하나의 시점


집을 조금 벗어나서 차로 삼십여 분을 내달리면 도착하는 조그만 섬 하나가 있다. 섬을 관통하는 은행나무길과 그 양옆으로 수많은 텐트들이 펼쳐져 있는 너른 잔디밭과 이름 모를 다양한 야생화와 나무들까지,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간직한 그곳은 고즈넉한 남한강이 아름드리 품고 있는 강천섬이다.

멀리서 보는 평온한 모습과 달리 강천섬은 입구에서부터 많은 차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집과 가깝고 내륙에 존재하는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우리 부부에게는 나름의 아지트로 통하는 그곳. 아내와 결혼 전에도 몇 번 함께 왔었지만 결혼 이후부터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매번 찾는 곳이 되었다.




지난봄이었다. 하얀 겨울을 지나 세상이 온통 초록으로 물들어가던 주말. 강천섬 입구에 위치한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차 뒤 트렁크에서 돗자리만 꺼내 들고 섬 안으로 향한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돗자리가 날아가지 않도록 주변에서 제법 무게가 나가는 돌멩이들을 여러 개 주워다가 고정해 놓고 산책을 나섰다.

나와 아내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섬의 복판을 가로지르는 은행나무길을 걸었다. 사실 그 길은 뭐니 뭐니 해도 가을에 우수수 떨어지는 노란 은행나뭇잎이 백미였지만, 푸릇해져 가는 모습도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한 커플이 내 눈에 들어왔다. 넘치는 인파에 둘러싸여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점점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커플의 모습에 나의 시선이 가닿았다.

우리처럼 두 손을 꼭 잡고 오손도 걸어오는 한 쌍의 커플. 그들의 모습은 푸릇푸릇한 계절과 참 잘 어울렸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두 사람 다 연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비슷한 느낌의 셔츠를 맞춰 입었다. 그 순간 당연하게도 그들이 우리와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던 나는 잠시 뒤 크게 놀랐다. 코앞에서 마주한 그 커플은 우리 부모님보다도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노부부였다. 머리는 희끗했고 마스크를 써서 눈 밑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구부정한 걸음걸이와 체형의 굴곡은 그들이 꽤 오랜 세월을 지나쳐 왔음을 직감케 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 안에 자리한 편견과 선입견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지를 깨달았다. 그들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부부가 맞다면 그 기억조차 까마득할 것이고, 아마도 그들에게 자녀가 있다면 모두 장성한 상태일 테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푸릇푸릇하게 영글어 가고 있었고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한들 부족함은 없어 보였다.

언젠가 나는 아내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린 나중에 나이가 들어도 지금처럼 잘 지내자. 서로가 좋아 죽고 애틋하고, 남들이 뭐라 하든 간에 달달하게 말이야."

그런 말을 했던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 길 위에서 나이가 지긋하지만 여전히 오붓한 노부부를 보며 으레 젊은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바보 같았다. 무조건 젊어야 아름답고 예쁜 사랑일까? 그 노부부를 보면서 사랑이 결코 젊음이라는 단어의 동의어가 아님을 깨달았다. 꽃이 핀다고 꼭 봄이 아닌 것처럼, 사랑이 젊음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은 엄청난 착각이고 오만이었다.

봄을 지나 어느덧 길어진 해를 보며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그 노부부를 떠올린다. 그들이 함께 걸어온 시간과 세월은 감히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길겠지만, 어쩌면 그들이 지나온 계절은 봄이나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이 아닌 그저 꽃이 피는 찰나의 순간은 아닐는지. 비록 언젠가는 지고 말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할 것처럼 꽃에 물을 주고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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