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마, 그때의 우리는 거기 계속 머물러 있으니까
지나온 시점
계절이 바뀌면서 옷장 정리를 했다. 맨투맨, 니트, 기모바지 같은 두꺼운 옷들은 가지런히 개서 옷장 깊숙이 집어넣고, 얇은 티셔츠와 반바지 그리고 리넨 셔츠 등의 시원한 여름옷은 안에서 꺼내어 옷걸이에 걸거나 서랍 맨 앞으로 빼놓았다.
약 한 시간 가량에 걸친 대공사(?)로 인해서 지쳐갈 때쯤, 옷장에서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체크 셔츠 하나를 발견했다. 서랍 안쪽에 꼬깃꼬깃해진 채로 접혀 있던 그 체크 셔츠는 마지막으로 언제 꺼내 입었었는지 그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즉시 내 시선은 버릴 옷들을 모아둔 네모난 상자로 향했다. 사전에 아내와 상의하여 올해 한 번도 입지 않았고 작년에도 건드리지 않은 옷들은 미련 없이 버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버리려고 하니 쉽사리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제는 유행이 다 지난 볼품없는 체크 셔츠이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가장 아끼던 옷이었다. 그 셔츠를 걸치면 맵시가 난다면서 아내도 좋아했었다. 그렇게 내 존재감을 드높여주던 옷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존재감 자체가 미미해졌다.
아내와 연애할 때 그 체크 셔츠를 입고 영화를 보러 갔었고 맛있는 음식도 먹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함께 웃고 서로 껴안고 울고불고 다투기도 했으며 미안하다, 사랑한다 말했었다. 그런 순간들이 이제는 어렴풋하다. 나는 왜 그토록 소중했던 순간들마저 잃어버리며 살고 있는 걸까. 심오한 물음들이 내 머릿속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마도 내 머릿속에는 기억을 저장할 공간이 한정적이라서, 지금 아내와 함께하는 매 순간이 너무 행복하기에 자꾸만 옛 기억들을 낭떠러지로 밀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내와 함께한 예전 기억들 역시도 무척 소중하기에 지나온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상실감에 빠져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정리를 멈추고 아내에게 이러한 생각들을 털어놓았다. 옷장을 정리하다 말고 뜬금없이 뭔 소리를 하는 거냐며 나무랄 줄 알았건만, 아내는 의외로 내 고민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과거가 기억에서 잊혀지는 거에 너무 연연하지 마. 어차피 그때 우리는 지금 그대로잖아."
"그래도 좀 아쉬워. 사진이라도 더 많이 찍어둘 걸."
내가 좀처럼 아쉬움을 떨쳐내지 못하자, 아내는 나를 다독여주었다.
"아마 나중에는 지금 이 순간들도 잊혀져 가겠지.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게 되지는 않잖아. 그래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거고."
아내의 말이 옳다. 잊혀지는 것에 대해 걱정하고 마음이 쓰이는 건 별수 없다손 치더라도 크게 연연할 필요까진 없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지금을 살아내는 것처럼 그때의 우리도 그 모습 그대로 거기 계속 머물러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