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내일부터는 좀 일찍 일어나기로 했어."
친구(는 아니고 아주 오래 알아 온 사람) 여럿이 있는 채팅 방에 새해 다짐을 올렸다.
비장한 각오를 상징하는 ‘칼’과 함께.
그 방 참여자들의 평소 행실을 알기에 딱히 응원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지인들 중 나름 참한 인간들이 모인 방으로 골랐지만.
뜬금없이 왜 ‘새해 다짐’ 따위냐 생각할 수도 있다.
굳이 이유를 만들자면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도로 이야기하겠다.
‘금주를 하겠다, 금연을 하겠다’ 같이 난도가 높은 결심은 순간순간의 고통이 크기만 할 뿐 실현 가능성이 없다. 좀 일찍 일어나는 것은 할 수가 있지 않을까? 게다가 ‘좀’이란 재량의 여지도 있다.
"좀은 어느 정도를 말합니까. 10분 정도를 이야기하는 거라면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눈치 빠른 넘)
"일찍은 10시 전입니까, 12시 전입니까? 오후 2시도 일찍이던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같이 살던 넘)
"할 일도 없으면서 하루가 너무 길어지지 않겠습니까. 요즘 일이 1도 없던데."(장부기장 해주는 세무사 넘)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당신은 새가 아니지 않습니까."(나도 안다.)
"혹시 세끼를 다 먹을 작정입니까?"
"오랜 시간 살고 싶으면, 담배나 술을 끊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빨리 그만두지 않으면, 디즈니플러스에도 가입하게 됩니다."
좀 일찍 일어났다. 첫날은 성공했다. 그러나 성공의 기쁨은 잠시.
어젯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할 일을 정하고 잤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최근 일찍 일어나 본 적이 없어서, 일찍 일어나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친구들의 비아냥을 인정하기 싫어할 일을 쥐어짰다.
뜨거운 물을 끓여 냉수에 부어 마셨다. 아침 공복에 마시면 좋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오래 열리지 않아서 잘 열리지 않는 창을 열고, 거실을 환기시켰다.
스트레칭을 좀 하려 했는데, 몸이 국민체조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한참 책장을 뒤져 기초적인 스트레칭 몇 가지를 했다.
처음부터 무리하면 다칠 수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아주 살살 짧게(책 찾는 데 걸린 시간만큼) 했다.
그릭요구르트를 먹으려는데 올리고당이 없었다. 올리고당을 사러 근처 다이소에 갔다. 올리고당을 팔지 않았다. 변기 세정제 앞에서 ‘변기 세정제, 인체’를 검색했더니 사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릭요구르트는 먹지 못 했다.
더 이상은 할 일이 없었다.
혹시 의뢰받은 사건 중 더 자세하게 검토할 건은 없는가 하고 생각했지만, 곧 진행하는 소송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게 사건이 없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사회 전체적으로 분쟁이 줄어서 내게까지 올 사건이 없다.
둘째는, 나보다 유능한 변호사가 많아졌기 때문에 내게까지 맡겨질 사건이 없다.
첫째라면 세상이 점점 더 평화로워지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좋은 일이고, 둘째라면 세상에 유능한 인재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것이므로 역시 좋은 일이다.
세상이 좋아질수록 나의 상태는 나빠진다는 것이 어쩐지 좀 불편했지만,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까지 한 성인들의 예를 생각하니 이해가 되는 면이 있었다.
왠지 할 일을 찾기 위한 노력이 더 하면 안 되는, 그것은 지구의 평화와 안녕을 해치는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노트북으로 유튜브를 보면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중요한 일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낮잠을 좀 잤다.
이미 지난달에 텔레비전을 치웠는데, 여전히 TV수신료가 부과되고 있다. 내일은 관리사무소에 가서 텔레비전을 없앴으니 수신료를 빼 달라 사정해야겠다. 관리사무소는 오전 9시 30분부터 업무를 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