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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by 천경득

지난해 늦은 여름 오스트리아 빈에 갔었다. 모 대학 최고위과정을 수강하는 동기들과의 단체여행이었다.

등록만 하고 출석을 드물게 해서 친한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찐 비엔나커피를 마셔보겠어 하는 마음으로 따라갔다.


그런데 너무 더웠다. 걷는 일정은 도저히 진행할 수 없었다. 걷는 일정을 빼니,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지구마불 세계여행’ 같은 해외여행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인솔 측에서는 이상 기후 탓이라 했지만, 검증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었다.


비엔나.jpg


40여 명이 식사시간이 되면 끼리끼리 테이블을 잡고, 친교를 나누었다.

일본처럼 혼자 앉는 테이블이 없었다.(가 본 적은 없음.)

우연히 세 명만 있는 빈자리를 찾아 엉거주춤 앉아서는 빨리 밥을 먹고, 화장실 가는 척 자리를 떴다.

대부분 금융기관 임원들로 서로 아는 사이여서 나는 늘 소화가 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은 식당에 우연히 마주 보고 둘만 앉는 작은 테이블이 있어 잽싸게 한 자리를 차지했다.

오래간만에 편안하고 여유 있게 대화에 대한 압박 없이 밥을 먹겠구나 싶었다.


“천 감사님, 지난번에 인사했었는데요?”(그때 나는 금융결제원의 감사로 재직 중이었다.)

B증권의 K부사장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나보다 10살이나 많았지만, 아주 동안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다.(사전에 포털에서 인물검색)


“아, 네. K부사장님. 앉으십시오.”(이미 앉았음.)


K는 유창한 잉글리시로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주문하고는,


“천 감사님, 엄청 동안이세요. 실례지만 몇 살입니까.”


‘상대가 몇 살인지 모른다’와 ‘엄청 동안이다’는 호응이 되는 말인가.


사람에게는 주민등록번호라는 것이 있고, 그 번호의 앞자리는 태어난 해와 날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기 전까지 나는 1972년생, 쥐띠였다.

(이제는 법으로 금지된) 우리 나이로 여덟 살이 되던 1979년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친구들도 전부 1972년생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주민등록증에는 1973년 7월 23일생으로 적혀있다.

생일도 전혀 뜬금없다.(음력 9월 17일을 기념하고 있다).

동생은 분명히 나와 두 살 터울인데 1974년생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고, 생일도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감히 왜 그런지 물어보지 않았다.

당시에는 반마다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들이 많았다.

그때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다리 밑에 다시 갖다 버린다는 협박을 쉽게 했다.

아주 폭력적인 시대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 공포는 극복이 되었지만, 새로운 어려움이 생겼다.

주민등록번호가 73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친구들은 예외 없이 ‘너 73이었어? 어린놈의 새끼가.’라고 쉽게 놀렸다.


실제 생활에서도 불편함이 많았다. 특히 담배를 사거나, 술집에서.

친구들에게 가능한 일이 내게는 불가능했다.

당시에는 엄격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요즘이었으면 술집에서 혼자 쫓겨났을 것이다. 가오가 서지 않았다.


그때에 기원하는 소심함이 평생을 따라다니며 나를 지금의 예민한 성격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엄마의 기억에 따르면, 아버지가 늦게 출생신고를 했다. 이유는 엄마도 모른다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된 것은 한참 나이가 들어서였다.

중년이 되면 어느 순간 공부상 나이를 어떻게든 한 살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날이 오기도 한다.

퇴직 시기를 늦추기 위해 공부상 나이와 실제 나이가 다르니 공부상 나이를 실제와 같이 줄여달라는 소송을 불사하는 경우도 있다.(반대로 늘여달라는 소송은 안 한다.)


나는 1972년생과 같이 살았지만, 친구들보다 1살이 젊다. 1년을 더 살 수 있다.

나는 언젠가부터 1973년생이다. 국가가 정리한 공적 장부에 따라서.


“K부사장님도 참 동안이세요.”


“아, 제가 몇 살인지 아세요?”


“네, 1962년생 아니신가요? 50대 초반으로 보이십니다. 새치도 없고.”


“하하, 감사합니다. 머리카락은 염색한 겁니다. 피부는 부모님께 물려받았죠.”


화기애애한 대화가 편안했다. 공감이란 이런 거지.

진짜 K는 내 또래라 해도 누구나 믿을 정도로 피부가 탱탱했다.

어떻게 관리를 하는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는 73년생이고, 만으로 51입니다.”


그는 진짜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식스센스'의 주인공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인 것이 밝혀지던 순간처럼.(SURPRISE!!!)


“51이에요? 저는, 제 또래인 줄 알았는데...”


“금융기관 임원이시고, 머리가 온통 하얘서, 당연히... 제 또래로...”


사실대로 52라고 말할 걸 하는 후회를 했다. 소화가 안 되어 밤새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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