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유 Oct 21. 2023

[단편] 삼도천사가 - 5화



수습국원으로 교내 방송국에 합류한 은수에게 지환은 하늘같은 선배였다. 한 기수 위의 선배는 원래 그런 것이었다. 갑갑한 입시를 집어던지고 대학에 들어선 은수를 입학과 동시에 연애를 꿈꿨다. 


꼭 CC가 되고 싶었다. 얼마나 좋을까. 이 대학생활이 얼마나 더 윤택해질까. 은수의 머리속에 어른이란, 대학생활이란, 그런 것이었다. 


정윤에게 지환의 얘기를 듣는 순간, 대학에 와서 정말 하고 싶었던 두 가지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동아리 활동과 연애.    

  

지환은 근사한 선배였다. 


큰 키. 어깨가 넓은 마른 체격. 니트티와 면바지가 잘 어울렸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오래도록 꿈꿔온 남자친구의 모습에 근접했다. 그런 그가 먼저 플러팅을 해왔다고 은수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작은 호감은 금방 키울 수 있는 긍정의 씨앗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환은 은수가 직간접적으로 마음을 보여주고, 곁을 일부러 내어줘도 좀처럼 속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의 크고 작은 행동은 온통 그린라이트인데, 은수는 답답했다. 

     

“아니, 발음단을 공부하는 데 음반실로 오라는 거야. 거기가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좁은 공간이거든. 완전 밀착될 수밖에 없는, 밀폐된 곳이란 말야. 거기 작은 책상에 나란히 앉아서 1:1로 발음을 알려주는 거야.” 

     

“오, 뭐야? 뭐야?”      


채영은 의미심장하고도 장난끼 넘치는 표정으로 은수의 팔을 쿡쿡 찔렀다. 은수도 싫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럼에도 짐짓 침착하고 신중한 채 말을 이어갔다.      


“끝까지 들어봐. 아야어여오요 하고 우 하는데, 내가 우 하니까. 선배가 지듯이 나를 보면서 은수야, 우 다시 해봐. 뽀뽀를 하듯 이렇게 입술을 내밀고 우 이렇게 우.”  

    

“아, 뭐야! 완전 끼 부리는 거 아냐? 선순데?”     


“그것뿐만이 아니야. 전체회의에 지각하면 그 기수 전체 1분에 1바퀴 운동장을 단체로 돌거든, 우리 기수가 도는데, 선배가 와서 나를 부르는 거야. 할 얘기가 있다고 그래서 선배랑 나란히 나는 뒤에서 걸었어.”      


“무슨 얘기?”      


“아니, 별 얘기는 없었어. 그냥 할 만하냐, 이런 거?”   

   

“야, 너 좋아하네! 지환 선배도!”      


“그런데 왜 말을 안할까?”      


“글쎄, 근데 간 볼 만큼 보다가 결국 얘기하지 않을까? 조만간?”     


은수와 채영의 예상과 달리 지환은 어떤 말도 없었고, 곧 그가 군대를 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은수는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먼저 얘기해 주지 않았냐, 따질 수 없었다.      


은수는 지환이 복무하는 동안 내내 편지를 써 보냈다. 지환은 답이 없었다. 


꼬박꼬박 수신확인을 하면서도. 은수는 알 수 없다 여기면서도 마음속으로 단념하게 됐다. 제대 후 지환은 편입준비를 시작하며 휴학했다. 


그새 은수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사랑이란 감정은 작정하고 만드는게 아니라 이렇게 불현듯 스며든, 어찌할 바 모를 감정이란 걸 처음 알았다.    

  

외모로 적합한 사람이 아닌, 심장이 먼저 두근거리는 사람이 정말 있었다. 이게 사랑이구나, 은수는 그와 교제를 시작했고, 오랜 연애기간을 거쳐 서른을 앞두고 결혼을 했다. 이른바 첫사랑에 성공한 셈이다.          


      



지환은 저 멀리서 바닥에 철퍼덕 앉아 장구를 치는 은수를 처음 보고 얼굴이 상기되는 걸 느꼈다. 윤정이 "은수야!" 이름을 부르고, 그녀가 윤정을 한번, 옆에 있는 자신을 한번 볼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정윤을 통해 동아리 가입을 권유했지만, 정말 은수가 테스트에 응하러 방송국 문을 열고 들어와 지환의 앞에 섰을 때 지환은 앞이 보이지 않는 어질함을 느꼈다.      


그 후로 지환은 매일 밤, 생각했다. 


은수의 얼굴을, 은수의 음성을, 은수의 입술을, 은수의 정수리를, 은수의 어깨를. 


(계속)

작가의 이전글 [단편] 삼도천사가 - 6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