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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Oct 22. 2023

살아있는 내 아빠의 제사

조금 구성원이 상이하거나, 역할이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보니 그렇다.


희생적인 엄마 그리고 가부장적인 독재자 아빠. 그 밑에 올망졸망 토끼같은 자식 몇몇.


우리네 사는 얘기는 여기서 파생되고 당시에는 파란만장하다 어느날 돌이켜보면 울고 웃게 된다.


내가 사는 얘기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특이사항이 있다면 내 아빠는 조금 더 캐릭터가 살아있다는 점. 


나는 그를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이상하다, 이걸 사전적으로는 어떻게 풀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괴팍하다'. '이해가 안된다', '쌩뚱맞다'는 뜻으로 쓴다.


독보적인 기세로 식구들 위에 군림하던 젊은 아빠는 노년기에 접어들며 다소 평범하고 무난한, 가끔은 tv 일일 연속극에 나오는 평범한 아버지의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신다.


특히, 외손주가 태어나고나서는 더없이 평범한 '우쭈쭈 우쭈쭈 내새끼 잘한다, 잘한다' 외할아버지의 전형을 보여주고 계신다.


육아는 나몰라라, 내 새끼도 안아준 적이 없는 경상도 싸나이, 아빠는 공교롭게 외손주를 나와 함께 공동육아 하셨다.


"이거 어떻게 하는기고?"

"아빠? 아빠가 이거 하게?? 진짜???"

"씰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퍼뜩해 봐라"


아빠는 환갑이 지나 처음 아기띠를 자발적으로 경험했다.


그렇게 아이를 안아 재우고,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유모차를 태워 쇼핑센터며, 공원을 돌았다. 아, 조리원에서 나오는 날, 핏덩이를 안고 집으로 가는 그날도 아빠와 나, 둘이었다.


그 자체로도 예쁜 게 첫 손주겠지만, 아빠가 아이를 남달라하는데는 납득 가능한 이유가 여럿 있는 셈이다.


그런 아빠가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본색을 드러냈다.





추석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아! 할 일이 생각이 났다!"  


주방에 있는데, 아들이 별안간 읽던 책을 집어 던지고 내 전화길 집어든다. 그리고 양가 조부모님과 차례차례 영상통화를 시작한다.  


누굴 닮아 저렇게 효자지? 내 새끼. 기특하기도 하지. 지켜보는 마음이 흐뭇하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오구오구, 내 손주. (이러쿵저러쿵) 외할아버지 씻고 나오셨다. 할아버지도 바꿔줄게."  


등산을 다녀온 아빠가 손주 전화에 서둘러 샤워를 마무리하고 옷을 입으신듯 하다. 욕실에서 방금 나온 따끈따끈 한 아빠가 상기된 얼굴로 손주의 근황체크를 한다.   


"아이고, 우리 강생이! 이제 추석이네, 추석 때 언제 내려가?"


"몰라요. 그건 아빠가 얘기 안해줬어요."


"우리 강생이, 할아버지 제사에 가는거야?"


"가야죠."


"그래그래. 가야지. 가야되는 거야. 나중에 외할아버지 제사에도 와야 해."


삽시간에 아이의 눈이 빨개진다. 10살. 한창 사나이의 눈물이 부끄러울 나이다.


내 어깨에 기대어 눈물을 꾹 찍어내지만, 역부족이다. 훌쩍이기 시작하는 아이.


이 뭉클한 상황이 랜선 너머로는 전달되지 않는지, 아이의 외할아버지는 "우리 강생이, 얼굴이 잘 안보이네? 잠 오나?" 얼굴을 보고 싶다 보챈다.


아이를 낳고 공감각을 통시 통역하는 재주가 생긴 나는 상황을 친절하게 랜선 너머 아빠에게 전한다.


"아빠가 아빠제사 얘기해서 슬픈가봐."  


"니가 씰! 데없는 소릴 해가꼬 그른거 아이가!"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뭐라고 했다고? 갑자기 불똥이 왜 나한테 튄거지??? 뭐지?? 내가 무슨 소릴 했던가?????


짧은 순간, 기억을 더듬어봤다. 내가 뭐라고 했나? 아니, 내가 한 얘기는 없다.


"아빠, 아빠제사 얘긴 아빠가 한거야."  


"씰!! 데없는 소리! (다시 우쭈쭈 모드로 바뀐다.) 할아버지 강생이, 괜찮아. 사람은 태어나면 한번은 가야 해. 할아버지 아빠도, 할아버지 엄마도 다 갔어. 원래 그런거야. 그건 슬픈게 아니야."  


갈수록..접입가경이다.. 애를 달래는 건지..더 울리는건지....  


당연한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그 황당한 사건의 전말을 아빠의 성격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니 납득이 가는 부분이 있다.


그래, 표현이 서툰 아빠는 무안하면 버럭 소릴 질러서 얼른 상황을 무마시키고, 반전시키지.


아이의 닭똥 같은 눈물에 그의 주특기가 오랜만에 나왔다. 사람은, 역시 쉽게 변하지 않지.


아빠는 아이의 눈물에 함께 눈시울이 붉어졌던 거 같다.


무뚝뚝한, 하지만 손주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외할아버지는 장난이 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난스레 농담반, 진담반 '자신의 제사'이야길 꺼냈는데, 아이는 말을 하지 않을 뿐 이제 알고 있다.


몇 년 전, 친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이는 제사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제사를 지낸다는 건, 그 대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걸 안다. 또 사람이 죽으면 어느 날 갑자기 그 존재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걸 이제 안다. 그런게 죽음이다.


아이는 외할아버지의 제사가 외할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의미라는 걸 떠올렸을 게 틀림없다.


그리고 아이가 운다는 건 아빠 시나리오에는 없던 얘기였겠지만. 아빠는 아이의 눈물에 자신이 아이를 생각하는 만큼 아이가 외할아버지를 생각해주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외할아버지 자존심에 아이와 함께 꺼이꺼이 울 수 없으니 만만한 딸이 죄인이 된 셈이다.  


이렇게 오랜만에 의문의 불똥이 떨어졌지만, 억울하지 않다. 그저 서글프다. 소리내어 울 수 없는 울음이, 눈물이 가슴에 사무친다.


전화를 끊고 아이는 괜찮아졌지만, 나는 참았던 눈물을 몰래 흘렸다.  


언젠가는 다가오겠지. 그날까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높은 확률로 내가 살아온 날보다 길지는 않겠지.


살아있는 내 부모의 언젠가 다가올 제사가 무섭고, 두렵고, 슬프다. 피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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