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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Nov 16. 2023

엄마의 겨울채비

오늘은 수능, 나도 옛날옛적에 수능을 봤다.


그 무시무시한 수능을 보고 어마어마한 해방감속에 대학에 입학했다.


듣자하니 요즘 대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여러 스터디로 조금은 고단하다고 하던데.


라떼는, 고삐 풀린 망아지들 같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대입 이후 목표는 오로지 둘.


연애! 동아리! 아쟈! 할 수 있다!!! 지성은 애초에 주머니 깊숙이 넣고 입학했다.


파스텔 핑크 오리털 게스 잠바에 헬로키티 핑크 머리띠를 한 갓 스물의 나는 탈춤이 추고 싶었다.


대학교 탈춤동아리를 가입하려고 동아리 방문을 열고 상담을 마친 후, 내가 밖을 나갔을 때 선배 언니, 오빠들은 걱정스럽게 얘길했다고 한다.  


"저 공주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낙양동천이화정(洛陽洞天 梨花亭)!!!
덩기덕~ 쿵더러러~ 덩기덕 쿵덕! 얼쑤!  


 치고, 장구 치고. 탈춤 추고 감자탕 먹고.


동아리방 고사마다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부침개와 막걸리를 얻어먹고 나의 대학교 1학년은 참 즐거웠다.  


(물론) 나는 만들지 않았지만 (진짜다..모르겠다. 일단 내 기억은 그렇다.) '소주피자'라는 말도 처음 접했다. 외국인 교수가 손바닥을 쫙 편 양 손을 번쩍 들며 "쏘 머치" "하우 매니" "소주피자"라고 했을 때 찰떡처럼 알아듣고 키득 거렸다.


사투리가 찰질 지언정, 태어났을 때 이미 지하철 2호선까지 뚫린 대도시에서 태어났다. 탄탄한 중견기업에 다니는 회사원 아빠와 전업주부 엄마의 빈틈없는 케어를 받고 자랐다.


그런 내가 경상도의 유교문화 뿌리 깊은 시골로 시집을 갔다. 아직 도시가스도 깔리지 않은 좁은 집, 우리도 불편한데 쟤가 정말 괜찮을까. 시댁 식구들은 모두 걱정했다고 한다.


"쟤가 밥은 먹고, 잠은 잘 수 있을까?"   


도대체 그런 걱정은 왜 미리하는건지. 사람을 뭘로 보고 훗! 나는 바퀴벌레보다 강하다. 엄마, 내 걱정은 하지마! 나 시집가서 엄청 잘 살고 있어.


"너무 맛있는데요? 이건 뭐에요? 우와, 진짜 맛있어요. 아..이걸로 장아찌 만든 건 처음 먹어봐요."


주접을 남발하며 배터지게 밥 한사발 꿀꺽 삼킨 보아뱀 같은 새아가에게는 몹쓸 식곤증이 있었다.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닐까 싶을만큼 밥상머리에서 순식간에 눈이 가물가물하다.


"니, 자부랍나?"


시아버지가 비켜주신 자리에 누워 '아, 정말 이래도 되나' 살짝 불편한 척 하더니 금새 골아 떨어지는 나를 보고 모두 입을 떡 벌렸다고 한다. 시댁식구들이 모두 앉아 있는 방 구석탱이에서 코를 골고 자는 저 아이. 뭐지?  


식당에서 고춧가루가 묻은 그릇도 슥~닦아내고 잘만 먹는다.


그렇게 씩씩한데, 김치에겐 유독 까탈스럽다.


나는 엄마김치는 볶아 먹고 씻어먹고 끓여먹고 좋아하지만, 다른 누구의 김치도 못먹는다.


그냥 뭐랄까 묘하게 집집마다 다른 냄새? 모양? 이런 부분을 예민하게 알아채고 거북해 한다.


시어머니가 해주신 모든 음식을 먹지만 김치는 먹지 않는다. 시누들에게 갖은 음식을 요구하지만 김치는 먹을 수 없다. 어떤 맛집에 가도, 설렁탕집에 가도 나는 깍두기도 김치도 먹지 않는다. 아니, 먹을 수 없다.  


이런 까탈스러운 나를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나의 창조주 모친밖에 없다.  


벌써 칠순인, 내게는 꽃보다 고운 우리 엄마는 나이보다 훨씬 더 삭은 관절을 가지고 있다. 시집간 딸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펼쳐질 늙은 주부의 명절이 걱정이다. 겨울의 초입에서 진행하는 김장은 정말 큰 일이다.


"아유, 이것도 못할까봐. 아빠랑 살살 하면 된다."


"(아빠가 정말 도와준다고? 그걸 믿으라고??) 아냐아냐, 내가 도와줄게. 아무것도 하지말고 기다려!"  


백번 이야기해도 소용없다. 도와주러 가면 이미 내가 오기 전에 모두 마치고 수육을 삶고 있다.  


갈수록 배추값, 생강값, 마늘값, 고추값도 만만치 않은데, 엄마의 관절도 무린데... 마음이 편치 않다. 그렇게 걱정스러우면 작작 먹든지. 눈치 없이 나는 아직도 엄마 김치밖에 못 먹는다. 너무 맛있다.


엄마의 겨울을 내가 더 길게 만드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제 그만 해도 되는데. 엄마 김치 그만 담궜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가 없으면 나는 이제 더이상 김치를 먹을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사연을 의뢰받아서 요리를 해주는 어떤 프로그램이었다. 의뢰인은 말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냉장고에 있는 김치를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고. 저 김치를 먹으면, 엄마의 손맛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생각에 마지막 김치는 먹을 수 없었다고.  


그렇게 냉장고 안 김치는 보기만 해도 코 끝이 매워지는 시간을 꽤 오래 보내야 했다. 그러다 의뢰인은 엄마의 손맛이 문득 그리워졌다고 했다. 저 오래된 김치로 엄마의 맛을 재연해낼 수 있을까.

 

"엄마의 김치를 살려서 요리해 달라"는 주문했다.  


마침내 요리가 끝나고 그 맛을 본 의뢰자는 울음이 터졌다. 다른 것은 기억속에 흐릿하지만 그 장면만은 너무 생생하다.   


"맞아요. 엄마가 한 김치에요. 엄마가 해준 맛. 그 맛이에요. 기억나요. 엄마."  


가을이 깊어 겨울이 됐다.


시간은 어김없이 또박또박 흐른다.  


엄마는 곧 김장을 할테고 나는 올해 또 행복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일상의 하루를 내어 엄마에게 가겠지. 아무렇지 않게 "엄마, 김치 맛있다." 호들갑을 떨며 배를 두드리겠지. 그런 나를 엄마는 또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우리딸은 엄마가 한거 뭐든 맛있다고 하지" 말하겠지.


다 늙은 딸은 더 늙은 엄마 품에서 하루이틀 응석을 부리며 수다를 떨다 차 트렁크에 엄마의 김장김치를 한가득 받아넣어, 우리집 냉장고에 차곡차곡 채워 넣겠지.


다가올 시간 앞에서 점점, 매해 김장김치가 매년 특별해지고 있다. 그 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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