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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Oct 14. 2022

넘치는 슬픔은 눈물로 흘려 보내세요.

잘 울지 않는 자의 잘 우는 방법

냉정하고 논리적으로 생긴(실제로도 더없이 그런) 남편은 자주 운다. 넘치는 인류애를 가진 박애주의자처럼 TV를 보다, 영화를 보다, 음악을 듣다 자주 글썽인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부터는 부쩍 더 자주 운다.


이 십년 가까이 겪은 남편이, 그냥 그저 글썽이거나 한줄기 눈물을 흘리던 남편이, 처음 아이처럼 엉엉 울었을때, 나는 남편이 아닌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할아버지는 아빠의 아빠야. 아빠는 이제 더 이상 아빠의 아빠를 볼수 없는거야.

그래서 아빠는 지금 가슴에 슬픔으로 가득 차 있어. 더 이상 다른 뭔가를 더 채워넣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픔이 꽉 차서 눈물로 흐르는 거야.
슬프면 충분히 울어서 마음을 잘 비워내야해. 그래야 다음에 다른 마음을 담을 수 있어. 아빠는 지금 슬픔을 잘 흘려보낼 시간이 필요해.
지금 아빠가 아주 많이 슬픈건 당연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는 아빠 잘 기다려주자.
잘 기다려주고, 슬픔이 많이 비워지면 우리의 에너지를 아빠의 마음에 다시 채워 넣어드리자."


영원히 고여있을 것 같은 슬픔도, 아무리 깊은 웅덩이라도 담을 수 있는 한계라는게 있다.


점점 차올라 결국 넘치게 되면 흐르게 되어 있고, 흐르면 비워진다. 돌고 돌아 다시 고이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건강한 눈물을 당연히 흘리고 다시 비워낼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의 건강 모두에 솔직한 감정표현이 필요한 이유다.  

충분한 눈물, 그게 사람을 슬픔에서 건져내는 힘이고 에너지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말하는 나는 극도의 화가 날때는 분노와 눈물을 함께 뿜어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슬픔의 정서 표현에 인색하다. 대개의 여자들은 친구나 연인이 울면 같이 울고 함께하는 공감의 정서가 발달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는 깊은 공감은 하면서도 눈물은 흐르지 않고, 그저 어쩔 줄 모르겠다.

실 눈물이 나지 않는게 아니라 늘상 꾹 참는다. 혹은 모르는 채 시선이나 생각을 돌려 울음을 막는다. 다른 사람에게는 울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하면서도 나는, 내가 우는게 싫다.  


그래서 슬픔이 가득 차도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못난 마음의 주인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쏟아낼 수 없어 어찌할 바 모를 때 짐짓 모르는 채 일단 즐겨 걷는다. 온전하지 않은 몸과 마음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을 먼저 추르리는 마음의 정화가 최우선이다.


아무도 없는 길, 외딴 길을 걸으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어느 순간 꽉 묶어놓았던 눈물 보따리 뚜껑이 뻥 소리를 내며 휙~ 날라간다. 우는 것과 동시에 씩씩한 에너지가 바로 마음의 감정 항아리 안으로 쑥 들어간다.


한번 경험해본 자는 그 중독성을 잊지 못할 정도로 개운하고 시원한 경험이다. 정한 힐링, 치유의 경험이다

이렇게  쉬고 잘 울고 나서 다시 가야할 곳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나는 나를 정하게 끝까지 모르는 척 하지 않, 내가 아는 가장 좋은 장소로 데려가 나름의 방법으로 잘 다독여 주었다. 


(), 사람 () 자가 나무 ()에 기대어 서 있다. 잘 쉬고 새 살이 잘 돋아났으니, 또 누군가의 기댈 언덕, 비빌 언덕이 되어줄 수 있겠다.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도, 감정의 항아리가 되어줄 수도 있다.


좋다. 오늘을 바라보는 마음이 든든하고,

기대가 되고, 행복하다. 마음이 좋다.

다고 말할 수 있어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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