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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Oct 21. 2023

[단편] 삼도천사가 - 2화

하루에도 수십 명의 차사가 명부에 적힌 이들을 이 다리 입구로 데려다 준다. 그리고 말한다.     

 

“자, 어서 건너가세요. 말씀드렸듯 걸어서 저 편으로 가시면 됩니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괴로운 기억이든, 즐거운 기억이든 이승에서의 기억은 잊혀질 거예요. 뛰어가시든, 쉬어가시든 상관없어요. 부디 걷는 걸음걸음이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원하는 다음 생 이루시길 바랍니다.”           


머뭇거리던 20대 초반의 여자가 걸음을 뗀다.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그동안 본 많은 사람들이 여자 같았다. 새로운 시작은 늘 두려운 법이지. 생의 끝에서 시작된 죽음의 통과의례를 사람들은 그렇게 시작한다. 

           

간혹 뛰는 사람도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 뗄 때마다 이승에서 기억이 지워진다는 얘기에 저 끝으로 순식간에 도달하는 이였다. 어떤 일이 그토록 그를 괴롭게 한 걸까, 한 가닥의 미련도 없이 저렇게 수 십 년의 삶을 지우고 싶을까. 


마음일지, 생각일지, 한 자락이 스쳐지나간다.          

 

더러는 뒷걸음질 치는 이들도 있었다. 


생에 미련이 남은 자들. 대개 두고 온 이가 애달픈 이들이었다. 그들을 보고도 나는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냉정을 유지해아 하는 차사일을 하기 위해서 일을 맡기 전 손에서 감정선을 지운 탓이다. 


그래도 나는 기다린다. 기다림은 감정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 나의 본능이었던 것 같다.     


누구도 설명해준 적 없지만 나는 이 삼도교에서 셀 수 없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버티며 스스로 알게 됐다.           

감정선은 타투 같다. 


깔끔하게 지워도, 말끔히 지워지지 않아 얼핏 지워진 듯 보이지만 가장 아래 진득한 흔적이 남는다. 희노애락으로 표정이 바뀌고 행동이 통제가 될 정도는 아니지만 이따금 나는 저릿한 마음을 느낀다.


다리 아래를 볼 때면 그렇다. 다리 아래에는 아직 다리에 오르지 못한 어린 망자들이 있다.       

    

이승의 놀이터쯤 될까? 신나게 놀고 있는 어린 영들을 보면 이곳이 어딘지 가끔 잊게 된다. 저 생기 넘치는 어린 영들은 부모를 기다리고 있다.      


산 자에 대한 미련은 죄가 되는데 특별한 몇몇은 예외적으로 눈감아주고 있다. 그중 하나가 어린 영들이다. 제가 죽은 줄도 모르는 영들도 있는데, 어떻게 어미아비를 기다리는 마음을 설명하고 그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이승에서는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을 두고 큰 죄라고 하지만, 저승의 법도는 그렇게 모질지 못하다. 어찌할 수 없는, 손쓸 방도 없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죄를 묻지 못한다.        


그들의 어미아비 중 하나라도 생을 다하면 차사는 다리 입구가 아닌 삼도천 냇가로 그들을 데리고 온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부르고 그리운 품에 뛰어든다. 


그렇게 하나 된 두 영은 함께 둘만의 배를 타고 다리를 건너게 된다. 사공도 없이. 두 영이 함께한 기억 중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성은 다리 저 끝에 당도할 때까지 남아 마침내 그 끝에서 손을 놓는 순간 잊힌다.          


간혹 다리로 '할멈''할아범'이 오는 경우가 있다.      


할멈이 올 때도, 할아범이 올 때도 있지만 하는 일도, 처리하는 방식도 닮았다. 


험상궂은 얼굴로 다리를 건너는 어느 망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다짜고짜 발가벗겨 냇가 옆 큰 나무에 옷을 걸어둔다. 옷을 빼앗긴 이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리 건너기를 포기하고 냇가로 내려온다.


손으로 가련하게 성기만 겨우 가린 이들을 어린 영들은 얼레리 꼴레리 놀린다. 할멈과 할아범은 빨래몽둥이로 이들의 볼기짝을 후들겨 패 강심연으로 쫒아버린다. 


거쎈 급류에 휩싸인 이들이 무사히 다리 위로 올라와 벌거벗은 채 저 편으로 건너가는지, 물살에 소멸되었는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생과 사의 이야기는 아니니까.    

      

이따금 헐레벌떡 차사가 영을 찾으러 오는 일도 있다. 두 가지의 케이스로, 둘 다 생령이다.      


권태로울 정도로 단조로운 이곳에서 유일하게 생생한 생의 일들이다.      


하나는 비교적 평이한 수준의 소동이다. 


식물인간 상태의 생령이 가끔 길을 잃고 있다가 정신 나간 차사 손에 끌려 삼도교에 이르는 일이다. 열 중 아홉, 열은 일찌감치 잡혀 다시 살아있는 육신에 돌아가게 된다. 


이곳에서 다시 붙들려 이승으로 가는 이들을 보는 일은 언제 봐도 흥미진진하다.      


다른 나머지는 굿판을 벌이다 초능력자처럼 불현듯 등장하는 경우다. 


살아있는 자가 그리운 이를 찾아 천의 굿판을 벌인 모양이다. 그런데 허사다. 안타깝게도 이승에서 49일이 지나면 이곳에서 그를 찾기 힘들다. 49일 이전에 그런 굿판을 벌인 경우는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여하튼 불법으로 무단침입한 이들을 길을 건너는 망자를 붙들고 자신이 아는 얼굴인지 일일이 확인할 때면 고요한 이곳에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단조로운 나의 일이 이 때만큼은 역동성을 띄게 된다. 


무단침입한 생령이야 감찰 차사가 끌고 나가기 때문에 사실 내가 신경 쓸 일이 없다. 그래도 체념, 포기하고 이승의 일을 잊어가던 망자들의 잔잔한 마음을 거세게 흔들리고 출렁이는 마음은 이따금 내게 영향을 미친다.           

일부는 주저앉아 망연자실 길을 건너기를 포기하고, 일부는 뒤를 돌아 뛰어간다.      


이 소동에 필히 누군가를 떠올렸음이다. 이미 다한 인연, 생의 인연을 어찌할 바 없다는 것을 알면서. 그들은 다시 흔들린다. 살아있는 생의 미련들이 죽은 자들을 뒤흔드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과 인연이 없는 생면부지의 연을. 


저승은 자연과 삶의 순리가 지엄한 곳이다. 의학도 과학도 통하지 않는. 오로지 순리만 있다.      


그 순리를 거스르고, 뒤흔든 죄는 분명 그들이 이곳에 당도하는 날 묻게 될 테지만. 나는 아직 그것을 본 적이 없다. 강심연에 빨려 들어간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듯. 내가 보고 듣고 이끌 수 있는 자들은 나처럼 평범한, 단조로운 이들 뿐이다.       


망자들의 걸음은 저마다 다르다. 


이승에서의 건강상태야 저승에 당도한 시점부터는 의미가 없다. 그저 타고난 성격이나 이승에서의 일들 때문에 떠오른 상념에 따라 속도가 달라진다. 다리 입구에 있는 망자들의 걸음은 저마다 다르지만, 다리 중반부터는 다들 비슷비슷하게 일정한 속도를 내는 것도 같은 이유다. 


처음에는 이승의 미련이 걸음을 붙들지만 걸음을 옮길수록 기억은 잊혀지니 갈수록 무념무상의 상태로 바지런히 걸을 뿐이다. 저승의 일들은 오로지 순리에 따른다고 했듯 가기만 한다면야 그들의 걸음을 탓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천천히 가도, 늦게 가도, 쉬었다 가도 그뿐이다. 당도하기만 한다면야.           


나는 도리어 걸음을 서두르는 이들에게 눈길이 간다. 가끔은 내게 말을 건네는 이들도 있다.           


“저기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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