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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령 <사랑의 잔상들>

by 례온

- 한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를 오래 생각하면 마음이 천길만길을 달려 그에게로 가닿는다고. 먼 나라에 있는 그에게 0과 1로 된 숫자의 세계를 통해 메세지를 송신한다는 것은, 아마 그런 것이었을 테다. 그 말을 믿는다. 그러나 안다. 그런 간철함 끝에도 오지 않은 것이 있음을.

오지 않은 것은 영원히 오지 않게 될까.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반대로 생각해보면 오고 있는 중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아직 닿지 않았다는 것은, 그러니 아주 느리게 당신에게 가고 있다는 말.

(p. 10-11)


- 단 한 번도 지우개를 가진 적이 없었다. 생의 핵심을 그린 적도 없었지만 지우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지울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걸 그린 캔버스는 어디에 있을까. 분명 우리는 매일 쉼없이 어딘가를 오갔는데 그건 어떤 지도에도 표시된 적이 없다. 눈길 위에 새겨진 바퀴 자국, 차창에 부딪힌 새의 주검, 분명 우리는 지운 적이 없었다.


아침 여덟시의 우리는 마치 어제를 잊은 것처럼, 단 한 번도 선을 그어본 적 없는 얼굴로 통근 버스를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안다. 매일 선을 긋고는 찢어져버렸던 오늘의 스케치들. 그걸 다 모아둔 커다란 화구통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걸. 그걸 펼치면 평생에 걸친 우리 삶도 울퉁불퉁한 하나의 선으로 나타날 뿐이라는 걸.

그런데 그 그림을 걸 수 있는 크기의 방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매일 밤 그 방의 존재를 잊기 위해 우리는 잠들고 다시 아침에 눈을 뜬다.

(p. 60)


- 동일한 것이 읽힌다. 보내는 사람은 받는 사람을 위해 편지를 썼겠지만 메세지만을 읽어본다면 꼭 그 사람이 수신자가 아니어도 되는 기이한 전이.

(p. 62)


- 사랑이란 결국 자기 안에 머무는 감정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이 죽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할 때에도 그 사랑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음을 결험한다. 외로움 혹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랑을 좇는다 해도 사실 그것은, 철저히 자기 안에 머문다. 카슨 매컬러스는 소설 <슬픈 카페의 노래>에서 사랑이란 두 사람의 공동경험이라고 했다. 이 말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 사랑하는 사람, 그는 사랑받는 사람이 자기 안의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일 뿐임을 아는 사람이다. 무수한 사랑과 이별 끝에도 자기 내면에 결코 사라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p. 67)


- 소설가 마르그리크 뒤라스는 평생을 사랑의 기억에 관해 썼다. 그녀는 나이 일흔 무렵이 되었을 때 <연인>이란 소설을 펴냈다. 노년의 여성인 작가가 삶의 가장 원초적 이미지로 거슬러가는 여정을 다룬 이야기다.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지 시절, 십대를 그것에서 보낸 그녀는 스무 살 연상의 중국계 남자를 사랑한 적이 있었다. 오랜 시간 그녀는 그 일을 쓸 수 없었다. 그 시절을 공유했던 가족이 모두 죽기 전에는. 그녀는 그토록 두려워했던 큰오빠가 세상을 뜨고 난 뒤에야 완전히 자유롭게 '그것'에 대해 쓸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곤 덧붙여 말한다. 이 작품을 끝내고 돌아보니, 그동안 썼던 수많은 책들은 이 이야기만은 하지 않지 위해 핵심을 에둘러 간 주변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노라고.

이상하게도 우리는 결별의 목전에 이르러서야 가장 깨끗하고 투명한 시간을 경험한다. 진실이란 결국 어떤 '대면'을 필요로 하고 결별은 거꾸고 대면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 대면은 결국 홀로 맞서야 하는 고독한 싸움이다. 그러나 사랑의 경우처럼 그 사건 안에 종속되ㅓ 있는 한 우리는 결코 그것을 대면하지 못한다.

(p. 86-87)


- 꿈을 꾸기 위해서는 잠에 빠져야만 한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어둠을 찾는다. 죽음을 앞둔 동물들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은신처를 찾아 헤맨다. 영화는 밝은 방에서는 상영될 수 없으며, 필름에 담기는 모든 이미지들은 빛을 통해 새겨지지만, 반드시 한 번은 물리적인 죽음(현상과정)을 통과해야만 우리눈에 보일 수 있는 네거티브 상이 된다.

작가의 글쓰기느 밝은 탁자 위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과의 단절, 고독이라는 깊은 어둠을 거쳐서만 비로소 그것은 나타난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문장들은 닷눔에 우리의 시선을 낚아채지만 어떤 문장들은 서서히 그 속에 스며들 것을 요구한다. 그런 세계에 ㄷㄹ어서기 위해 우리가 견뎌야 하는 것은 어둠이라는 시간이다.

이처럼 어둠은 사랑의 권리이고 꿈꾸는 사람, 이미지를 보는 사람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십사 시간 불 켜진 상점들로 가득한 빛의 도시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권리를 파기한다. 이곳에서는 거꾸로 이미지의 소멸, 사랑의 소멸이 일어난다.

(p. 144-145)


- 애도를 은폐하려는 시도는 존재 자체를 없던 것으로 수정하려 든다. 지금도 광화문 광장에는 삶에도 죽음에도 속하지 않은 유령같은 영역이 있다. 그 자리는 명백히 모두의 눈에 띄는 곳에 남아 있지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언젠가 한번은 바로 그 광장에서 축제가 벌어지는 걸 보았다. 그것은 곁에서 애도하는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애도하는 자에게서 새오나오는 신음 소리를 막는 것으로 이별이란 사건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p. 151)


- 영화가 그렇듯 기억이란 이미지로 된 점들을 이어 선을 만드는 과정일 수 있다. 우리는 각각 그 점들을 다르게 인식하고 자신만의 선을 간직한다.

왜 우리는 유사한 것, 혹은 닮은 것을 찾아 헤맬까.

마치 사실 그대로를 직면하는 것이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실재보다 그와 닮은 어떤 것이 진실ㅇ 더 가까이 있기라도 하다는 듯.

같은 점을 두고도 모두가 다른 선을 긋는다는 게, 당연하다는 듯.

(p. 174)


- 사랑이 끝날 때 그 사랑은 모두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기다림의 마지막날에, 사랑은 왜 스스로를 단념하는지 결국 나는 알지 못했다. 다시 만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었기에 질문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내가 기억하던 영화는 나의 영화였고, 이후 나는 몇 번 같은 제목의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에서 그 영화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나는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부재하는 기억의 장소. 그러나 기억이 보존된 장소로서의 영화.)

(p. 177)


- 불멸의 시간이 찾아올 때면 가만히 통증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에게 몸이 없었다면 통증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통증이 없었다면 그토록 천천히 바라볼 시간 또한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몸이 있다는 것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감각적인 일이다.

(p.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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