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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sepina May 20. 2020

짐작과는 다른 일들

반전이 해피엔딩 일수도.

 회식 후 오래간만에 애청하는 드라마 시작 시간에 늦을까 봐 잰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문 앞에 택배가 두 개 놓여 있다. 뭐지? 난 집으로 택배를 시키지 않는데? 주소를 보니 뒤에 번지수와 건물 호수만 맞고 동이 다른 주소다. 오배송된 택배였다. 일단 들고 들어와서 TV를 켜놓고 물건과 받는 사람을 살폈다. 품목은 둘 다 쇼핑몰 사이트에서 산 옷이었고 주문자는 여자다. 다행히(!) 안심번호를 사용하지 않아 번호가 노출되어 있었다. 택배 사진을 찍어 문자를 보냈다. 답장이 바로 오지 않자 또 내 주특기가 발휘된다. 한 순간에 오만가지의 시나리오가 펼쳐지며 별일도 아닌데 불안지수가 치솟는다.(이미 드라마 집중도는 떨어지고 말았다.)


연락이 안 오면 저 택배를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일단 계속 가지고 있어야겠지? 근데 내가 이사할 때까지 연락이 안 오면? 그땐 내가 알아서 처리해도 되나? 요즘 이상한 사람 많은데 나한테 뭐 해결해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 나중에 찾으러 온다고 하면 내가 집에 있어야 하나? 문 앞에 두고 갔는데 분실됐다고 나한테 뭐라고 하면? 찾으러 온다고 해놓고 차일피일 미루고 안 오면..? 아.. 신경 쓰여!! 남의 물건!! 신경 쓰여!!

 글로 적고 보니 진짜 짧은 순간 별 생각을 다 했다 싶다. (이 회차 드라마 앞부분 하나도 생각 안 나..) 다행히 30분 뒤쯤 물건 주인의 답장이 왔고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정상적인(!) 답변에 1차 안심을 했다. 지금 바로 찾아가겠다는 말에 2차 안심을 하고 상세 주소를 알려주면서 그녀(?)의 도착이 임박했을 때 문 앞에 물건을 두고 사진을 찍어 보냈다. (굳이 대면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드라마에 집중하려고 그런 건데 드라마는 계속 집중하지 못했음..)

 그리고 잠시 후, 택배를 찾아갔다는 말과 함께 감사의 의미로 과자를 문고리에 달아 두고 간 사진이 전송되어 왔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택배 기사의 착각으로 잘못 배송된 물건을 낯선 곳에 찾으러 간다는 게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연신 내게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그 마음을 표현하는 그녀의 방식이 요즘 보기 드문 일 같아서.


 일상에서 예기치 못한 일을 만났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어날 것 같은 수많은 가정을 하면서도 어째서 이런 짐작은 내 예상 답안에 하나도 없었을까.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 경우의 수도 얼마든지 있었는데.

 원래부터 이렇게 생겨먹었지. 하고 말기엔 나의 이 단점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너무 큰 걸림돌이자 아쉬움이다. 이렇게 생겨 먹을 수밖에 없었던 내 인생의 서사를 들먹거리자면 이유야 충분하지만(내가 생각하기엔?) 그 명분이, 과거가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순 있어도 미래의 비관적인 나까지 정당화할 순 없는 거니까.  

 조금은 사뿐하게 가벼워지고 싶다. 사람은 잘 안 변하고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하니까(응?) 한 번에 아예 다른 내가 될 순 없겠지만 작은 것에서부터 생각의 방향을 트는 습관을 들이고 싶다.

 물론 알고 있다. 이런 생각 처음 하는 게 아니고 여태껏 같은 말을 하면서도 못 고쳤다는 걸. 그래도 말이라도 자꾸 하다 보면 부정적 사고패턴에 익숙해진 뇌 회로가 유턴까지는 못해도 깜빡이 정도는 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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