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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뽀 May 09. 2024

2011년, 올레길과 처음 마주하다.

24살의 내가 혼자서 올레 1코스와 1-1코스를 걸었던 이유


24살의 어느 봄날, 나는 제주에 첫발을 내디뎠다.


나 혼자 첫 제주 여행이었는데, 내가 제주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올레길 걷기'였다. 왜 하필 나는 올레길을 떠올렸을까?


면허는 있지만 운전을 할 줄 몰라 뚜벅이 여행을 해야 했으니, 천천히 걸으면서 제주를 둘러볼 수 있는 길을 찾아 걷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건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는 걸, 나는 안다.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때 나는 아주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는 중이었다. 내 인생 그래프를 그려 보자면 가장 밑바닥에 점을 찍어야 했던 그 때... 나를 잠식하고 있던 어둠을 물리칠 만한 강력한 빛이 필요했던 그 때...


22살의 어느 봄날,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대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 가시던 그 날부터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평온했던 나날들이 온통 잿빛으로 뒤덮였고, 하루하루를 온전하게 살아내는 것이 버거웠다. 그저 아버지가 보고 싶었고, 아버지와 함께 했던 모든 날들이 그리웠다.


그런 무자비한 시간들 속에서 나는 씩씩한 척 살아가고 있었다. 아니, 겨우 살아내고 있었다.


마음껏 아파하고 목놓아 울기에도 바빴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내가 아버지를 잃든 말든, 세상은 잘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잃은 다음 해에 대학교 4학년이 되었고... 정신을 바짝 차려 어떻게든 내 밥벌이를 마련해서 대학교를 졸업해야만 했다.


23살의 나는 아버지를 가슴에 품은 채로 1년간 취업을 위한 시험에만 몰두했고, 다행히 합격을 해서 원하던 직업을 얻게 되었다. 내가 원했던 그 직업은 사실, 살아 생전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시던 나의 직업이었다.


24살의 봄, 그러니까 제주를 찾았던 그 봄은 아버지 기일을 두 번째로 맞이했을 즈음이다.


나는 아버지가 꿈에도 바라시던 그 직업을 갖게 되었는데, 아버지 옆에 옴싹 달라 붙은 채로 종알종알 이야기하며 자랑하고 싶었는데, 그런 아버지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던 시기... 아버지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던 때...


나는 그 때 훌쩍, 제주로 떠났던 것이다.


집에는 나보다 더 힘들어 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남편을 잃은 고통을 겪고 있던 엄마, 중2병에 걸려 몹쓸 짓을 했어도 다 이해 받았을 15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남동생, 그 슬픔의 한 가운데서 두 번이나 나와 같은 시험을 보느라 몹시도 고생한 언니... 이 세 사람 앞에서만큼은 나의 슬픔을 감춰야만 할 것 같았다.


가족들 중에서 그나마 덜 힘든 축에 속한다고 생각한 나는 우리 집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며 지내고 있었다. 가족들 앞에서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느라 속으로 삼키기만 했던 울음은, 한계 수위에 다다라 터져 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제는 꾹꾹 눌러 참아왔던 나의 감정을 마음껏 쏟아낼 필요가 있었다. 가족들 곁을 잠시 떠나서, 울고 싶으면 혼자 실컷 울 수 있는 낯선 곳에 닿고 싶었다.


2020년, 제주 브릭캠퍼스에서 만났던 좋은 글귀 :)




그러다 생각해낸 곳이 제주의 올레길이었다.


올레길 위에서는 다리가 너무 아프다는 이유로 땅바닥에 앉아 울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혹은 올레길 코스 한 개를 완주한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 올라 울고 있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물론 올레길 완주했다고 우는 사람도 없을 테지만^^;)


그러니 내 기준, 걷다가 울어도 좋은 그 길! 올레길을 기어코 찾아가 걷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렇게 걷게 된 내 인생 첫 올레길은 바로 '올레길 1코스'였다. 나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주었던 그 길을 나는 13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뜨거운 햇살을 머리 위에 지고, 올레 1코스를 하루종일 걸으며 생각했다.


내 인생에도 이토록 찬란하게 빛나는 길이 펼쳐질 거라고.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한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어둠의 터널에서도 곧 빠져 나갈 수 있을 거라고. 그런 희망을 품게 해준 길이었다.


아침부터 걸었는데 늦은 오후가 다 되어서야 목표로 했던 1코스 종점, 광치기 해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말미오름과 알오름에서 내려다 본 아름다운 종달리 바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던 종달리 마을, 우도와 성산일출봉을 내내 보면서 걸을 수 있었던 해안길, 광치기 해변에서 바라본 거대한 성산일출봉, 내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좋았다. 자연을 통해 위로 받는 시간이었다.


그 때 나는 제주도가 처음이었고, 오름에 오른 것도 처음이었고, 제주의 바다 색깔을 두 눈으로 본 것도 처음이었다. 두 말 하면 잔소리겠지만, 처음 마주한 제주는 진심으로 아름답고 황홀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제주를, 내 두 발로 걸으며 찬찬히 볼 수 있다는 게 올레길 걷기만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부터 나는 '언젠가 모든 올레길을 다 걷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던 것 같다.


2024년, 1코스 종점 광치기 해변에 오랜만에 가본 날 :)




올레 1코스를 걷고 난 다음 날, 게스트 하우스에서 눈을 뜨니 온몸이 뻐근했다. 다리에도 온통 알이 배겨 있고, 발가락도 멍든 것 마냥 아팠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으니! 예정대로 배를 타고 우도에 들어 갔다. 그 날 목표는 올레 1-1코스 걷기였기 때문이다.


해가 쨍하게 났다가, 먹구름이 꼈다가, 날씨가 변덕을 많이 부리던 날이었는데 겁도 없이 도전을 했던 24살의 나... 지금 와서 돌아보니 패기가 넘쳤는데, 나중에는 이게 화근이 되어 돌아 왔다. 물론 그 때는 제주가 처음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섬 날씨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게 더 큰 문제였고.


우도에 도착한 나는 올레길을 걸으며 혼자 사진도 찍고, 헥헥대며 소머리 오름오르고, 예쁘기로 소문난 홍조 단괴 해빈하고수동 해수욕장에서 부드러운 모래도 만져 보고, 쉬고 싶을 아무데나 앉아 바다 멍도 때리며 그렇게 우도를 즐기고 있었다.


올레길 1-1코스의 끝자락, 배를 타고 다시 본섬으로 돌아가야 하는 항구까지 걸어가던 그 때, 생각지도 못한 위기가 닥쳤다. 바닷길을 걷고 있는데 거친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것이다.


갑자기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졌고, 비는 거센 바람과 함께 사방에서 들이쳤다. 비바람 속에서 내 몸을 가누며 걷는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처음 알았고, 비에 쫄딱 맞은 생쥐꼴이 되어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처량한 기분인지도 처음 느꼈다.


우산이 있었어도 펴보지 못했을 악천우 속에서, 설상가상으로 내가 걷던 좁게 난 길 위로 자꾸 큰 파도가 덮쳐 왔다. 마치 나를 한 입에 삼켜버릴 듯이 큼직하게 넘어오는 파도... 파도가 이토록 무서울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은 날이었다.


파도가 밀려 들 때마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도 함께 몰려 왔다. 까딱 잘못 하다간 파도에 휩쓸려, 혹은 거센 바닷바람에 떠밀려, 바다 속으로 내 몸이 끌려 들어 갈 것만 같은 느낌! 자연의 어마무시한 힘에 압도 당한 순간이었다.


항구로 가는 길은 딱 그 길 뿐이었는데, 비를 피해서 들어갈 만한 상점 하나 보이지 않는 지점이었다. 개미 마리 보이지 않는 인적 없는 섬에서, 비바람과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걸어 했던 그 길 위에서, 나는 '살고 싶다'는 원초적인 생각만 간절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비바람과 파도에 맞서서 걷다 보니 마침내 항구가 보였다. (포기하고 싶어도, 배를 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걸어야 했던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ㅠㅠ)


올레길 종점에 도착하자마자 다리에 탁 하고 힘이 풀려 맥없이 주저 앉게 되었다. 마치 나를 놀리기라도 하려는 듯, 쉬이 잠잠해지지 않을 것 같던 비바람은 왜 하필 내가 다 걷고 난 그 때 딱 멈추던지!


우도 올레길 위에서 보낸 버라이어티 한 하루 속에 인생이 담긴 것만 같았다.


길을 걷다 예상치 못한 비바람을 만나는 것.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의 슬픈 단면이 아닐까. 내가 아버지를 갑자기 떠나 보내야 했던 것처럼...


그런데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모진 비바람도 결국엔 멈추게 되어 있다. 영원히 계속 될 것만 같던 어두컴컴한 세상도 구름 속에 숨어 있던 해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다시 환하게 밝아지는 법.


감사한 사실 한 가지는 아버지를 잃은 나에게도, 그러니까 비에 쫄딱 젖은 나에게도 따스한 햇빛은 공평하게 내리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갑자기 큰 비를 만났다고 쫄지 말자. 당장은 힘들고 버거울 수 있지만,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반드시 해가 뜬다는 걸 기억하자. 이것이 우도 올레길 위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의 위로 분명 모진 비바람은 몰아칠 것이었다.


그 때의 나는 올레길 위에서 배운대로 조금 더 의연하게 비바람을 맞을 생각이었다. 어쩌면 조금은 더 단단해지고 한뼘 성장했을 나를 발견하며, 다시 밝게 내리쬐는 햇살을 조명 삼아 환하게 웃을 예정이었다.


2020년, 가족 여행 중에 다시 가 본 우도는 참 맑았더랍니다 :)




13년이 흘렀다. 올레길 두 코스를 혼자 걸었던 그 때로부터.


얼마 전에는 아버지 기일을 15번째로 맞았고, 현재 나는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고, 남편과 동반 휴직을 한 채 제주 일년 살이를 하러 와 있다.



제주에 사는 1년 동안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야?


나? 올레길을 다 걷고 싶어. 제주를 크게 한 바퀴, 내 발로 걷는 게 오랜 꿈이었어!



제주로 이사를 온 뒤 남편이 내게 물어 왔고, 나는 오래 전부터 꿈꿔 왔던 나의 소망을 말했다. 남편은 흔쾌히 OK 싸인을 보여 주었고, 나는 그렇게 제주 올레길 완주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올레길을 걷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으니...


그건 바로 나의 귀여운 두 따님들이었다!

 

2024년, 제주 올레 공식 안내소에서 받아 온 코스 안내도!



제주 올레 : 437km, 27코스

제주 올레는 걸어서 여행하는 이들을 위한 길입니다. 끊어진 길을 잇고, 잊혀진 길을 찾고, 사라진 길을 불러내어 걷는 사람들이 걷고 싶은 만큼 걸을 수 있는 긴 길, 제주 올레를 만들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이 길에서 평화와 자연을 사랑하는 행복한 여행자가 되십시오.


2020년, 제주 브릭캠퍼스에서 만난 미니어쳐 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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