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체리뽀 May 23. 2024

2024년, 딸들과 올레길을 걷기로 했다.

초등학교 4학년, 2학년 두 딸과 올레길 완주... 가능할까?


사실은 두려웠다. 진짜로 아이들이 올레길을 걷겠다고 할까봐.




"얘들아, 엄마는 제주에 사는 일년 동안 올레길을 다 걸어 보려고 해. 너희도 같이 걸을 거야?"


별 거 아니라는 듯이 '툭' 질문을 던지면서도 속으로는 아이들 입에서 "아니, 나는 안 걸을래~" 라는 대답이 돌아오길 바라고 있었다.


"올레길, 그게 뭔데?"


"제주도를 크게 한 바퀴 걸을 수 있게 만들어 둔 길이야! 걸어 보면 알겠지만 엄~청 길고 힘들어!"


초등학교 4학년 큰 딸이 올레길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걷기에 몹시 힘든 길임을 강조하며 올레길을 설명했다.


"우리가 걷기 싫다고 하면?"


'오, 그럼 엄마는 정말 땡큐지!' 라는 말이 입밖으로 나올 했지만 간신히 참으며 대답했다.


"너희 학교 간 시간 동안, 아빠랑 둘이서 틈틈이 올레길 걷고 오면 되지!"


"엥? 우리만 빼놓고? 둘이서만 데이트를 하겠다고? 그건 안돼~~~"


큰 딸은 올레길 걷기에는 별 흥미가 없어 보였으나, 엄마 아빠가 둘이서만 무언가를 한다는 사실에는 격렬히 반응했다. 그녀에게 엄마 아빠가 어떤 길을 걷는다는 건 그저 '데이트'였던 모양. 다급해진 그녀는 딴짓 하고 있던 동생을 불러와 사태의 심각성을 공유했다.


"큰일 났어!! 엄마랑 아빠가 둘이서만 우리 놔두고 올레길이란 걸 걷고 다닐 거래~ 너 괜찮아?"


"뭐? 둘이서만 어딜 간다고? 안 돼~ 나도 무조건 데려 가~"


초등학교 2학년 작은 딸은 올레길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같이 가겠단다. 맙소사! 아이들에게 더욱 진지하게, 올레길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제주도는 생각보다 큰 섬이야! 제주도를 크게 한 바퀴 다 걷는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울 수도 있어~ 너희가 올레길을 걷겠다고 하면 주말마다 하루종일 걷기만 해야 되는데 괜찮겠어?





아이들은 늘 내 예상을 빗나간다.


제주 일년 살이를 하는 동안 아이들과 올레길 27코스를 다 걸으려면 너무 춥고 너무 더운 시기인 아이들 방학 때는 제외, 대부분의 주말마다 올레길을 걸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빠듯해서 올레길 완주가 불가능하게 느껴졌고, 평일에 학교 다니느라 지쳤을 아이들에게 주말마다 걷는 일에만 매달리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주말엔 아이들도 충분히 쉬고 놀아야 되니까!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 가는 평일에 남편과 둘이서만 후딱 올레길을 걷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서 걷는 길에 굳이, 억지로, 아이들까지 참여시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먼저 물어 본 이유는 혹시 나중에 알게 됐을 때, "우리도 올레길 걷고 싶었는데 왜 엄마 아빠 둘이서만 간 거야?"라는 항의를 받게 될까봐서였다.


"엄마! 우리 한라산도 정상까지 다녀왔고~ 한양 도성길도 완주했잖아! 올레길도 다 걸을 수 있어!"


"엄마 같이 걷자~ 나도 제주도 한 바퀴 다 걸어 볼래!"


아이들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같이 걷고 싶다는 그 말은 순도 100%였다.


남편이 두 번 세 번 다시 물어봐도 아이들의 대답은 철옹성같이 단단했다.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던 남편도 이내 포기하고, 아이들에게 끝까지 함께 올레길을 걷자고 약속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렸다.


"얘들아! 너희가 스스로 올레길 걷겠다고 했으니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같이 걷는 거다?"


초등학교 4학년 큰 딸, 그리고 2학년 작은 딸과 함께 올레길 걷기를 결심하게 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아이들이 '올레길 걷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제주 일년 살이를 결심한 직후였던 작년 가을, 잠시 동안 떠나 있을 서울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 온 한양 도성길 스탬프 투어! 아이들과 도전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서울 한양 도성 :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 도성은 조선 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쌓았던 성곽을 말한다.

서울 한양 도성 스탬프 투어 : 흥인지문, 숭례문, 돈의문 터, 숙정문을 지나는 성곽길을 걸으며 스탬프를 찍고 인증 사진을 찍어서 제출하면 <한양 도성 순성길 완주 인증서>를 발급 받을 수 있다.



우리 가족은 날이 좋았던 작년 가을, 3주에 걸쳐 주말마다 한양 도성길을 걸었다.


첫주에는 혜화문에서 출발, 낙산에 올라 인증 사진을 찍고 흥인지문으로 내려와 스탬프를 찍었다. 흥인지문 근처에는 '한양 도성 박물관'도 있어서 잠깐 들렀는데 아이들이 역사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광희문을 지나 장충동에 도착하니 어느새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한양 도성길 걷기 첫 날! 혜화문에서 낙산 오르는 성곽길과 흥인지문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둘째 주에는 장충체육관에서 출발, 남산에 올라 서울타워 구경도 하고 인증 사진도 찍은 뒤 숭례문으로 내려와 스탬프를 찍었다. 아름다운 덕수궁 돌담길을 통과할 즈음 해가 지기 시작했고, 돈의문 터에서 추가로 스탬프를 찍은 후 밤 늦게 귀가했다. 단풍이 곱게 물들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가을날이었다.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던 둘째 주, 남산으로 올라가는 성곽길 모습^^


마지막 주에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인왕산과 백악산 구간을 한 번에 다녀 오게 되었다! 2주 동안 아이들이 걷기에 꽤나 진심이란 것을 느꼈고, 생각보다 잘 걷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먼저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서 출발하여 인왕산부터 올랐다. 아이들은 내가 따라 잡기도 어려울 만큼 빠르고 잽싸게 먼저 정상에 도착해 있었다. 인왕산 정상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창의문 쪽으로 내려와 점심을 먹으며 체력을 보충했다.


인왕산에 오른 셋째 주, 우리가 걸어 온 성곽길과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대망의 마지막 구간인 백악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청와대가 한 눈에 들여다 보인다는 이유로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구간이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경사가 심해 거의 기다시피 계단을 올라야 했던 지옥의(?) 구간으로 기억될 뿐...^^


구슬땀을 흘리며 백악산 정상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그 곳에 계시던 관리인께서 아이들을 보시며 무척 놀라워 하셨다. 아이들은 칭찬에 힘입어 오늘만 벌써 2개의 산을 올랐다며 자랑하기 바빴다. 뿌듯한 마음으로 하산하며 숙정문을 지나 말바위 안내소에 들러 마지막 스탬프를 찍었다.


한양 도성 투어의 최초 출발 지점이었던 혜화문까지 지친 몸을 이끌고 내려가고 있자니 해가 지고 있었다. 동시에 성곽 아래 조명이 '탁'하고 켜지며, 걷고 있던 모든 길이 환하게 밝아졌다. 마치 우리 가족의 '한양 도성길 스탬프 투어' 완주를 축하하는 폭죽을 터뜨려 주는 것만 같았다.


엄청난 오르막 경사를 자랑하는 백악산 성곽길과 혜화문으로 향하는 중에 불이 들어와 더욱 예뻤던 성곽길


아이들에게 '한양 도성 스탬프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친 소감을 물으니 그저 재미있었단다. 나중에 완주 인증서와 뱃지까지 받고 나서는 더욱 뿌듯해 했고.


제주도를 한 바퀴 크게 도는 올레길과 비교하자면 턱없이 짧은 거리였지만, 어쨌든 아이들은 둥글게 이어진 길을 다 걷고 구간마다 스탬프를 찍어 완주 인증서를 받아 보는 체험을 미리 해본 셈이었다.


그러니 올레길 역시도 한양 도성길을 다 걸었던 것처럼 금방 걸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호기롭게 도전을 외친 걸 수도...^^


제주로 이사 온 2월에는 눈 오는 겨울 한라산도 정상까지 올랐고, 4월에는 관음사 코스로 다시 한 번 한라산 정상에 올라 백록담까지 보고 온 경력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본인들 스스로 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고 오래 걷는 것도 잘한다고 말하는 아이들. 그러니 올레길을 걷는 것도 무조건 도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가족 모두가 받았던 '한양 도성 순성길 완주 인증서'




아이들의 올레길 걷기 도전에 대한 확답을 받은 다음날, 남편과 나는 집 가까이에 있는 '제주 올레 안내소'에 들러 올레 패스포트를 4개나 구매했다. (가격이 2만원이라 모두 다 해서 8만원... 후덜덜!)


이제 올레 패스포트까지 다 샀으니, 더는 무를 수도 없는 일이 되었다! 귀여운 딸들과 함께 올레길 완주를 위해 힘차게 걷고 또 걷는 수밖에.


올레 패스포트 사던 날, 남편은 바당색! 아이들과 나는 귤색!




아이들은 길 위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

뜨거운 땡볕 뒤에 마주친 그늘의 고마움.

제주의 아름다운 돌길, 숲길, 바닷길을 걷는 기쁨.

열심히 걷고 난 뒤에 먹는 밥의 꿀맛.

갈증이 날 때 마시는 물 한 모금의 소중함.

손을 잡고 걸으며 도란도란 나누는 가족과의 친밀한 대화.

'대단하다, 잘 걷는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의 응원.

올레길 표식을 보며 스스로 길을 찾는 보람.

넘어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걷는 용기.


딸들과 올레길을 걷는 여정 속에서, 나는 또 어떤 것을 배우게 될까.


기대에 가득 찬 채로 올레 패스포트를 배낭에 넣고, 올레길을 걸을 준비를 마쳤다.


2011년에 처음 올레길을 걸을 때는 나 혼자였지만, 13년이 지난 지금 다시 올레길을 걸을 때는 딸들과 함께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올레길을 걷는 의미는 충분하다.


함께 올레길을 걷자고 해줘서 고마워 딸들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