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편의 모든 모습을 애정하지만, 유독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모습이 하나 있다. 바로, 남편이 부엌에서 밥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식사 시간이 다가오면 남편이 무슨 메뉴를 만들어 줄 지 궁금해서 설레고, 남편이 차려준 음식을 맛보면 또 한 번 맛있어서 설렌다. 하루에 세 끼를 먹는 날이면 적어도, 하루에 세 번은 남편에게 반하는 셈!
쓰고 보니까 어쩐지 나, 그냥 남편 말고 "맛있는 걸 해주는 남편"을 사랑하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긴 하는데... 어쨌거나 저쨌거나 맛있는 걸 해주는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지 않나?
그러니까 밥 해주는 우리 남편은 좋은 사람이고, 그래서 내가 참 좋아하는 사람이다.
요리하는 남편, 설렘 유발자...♡
처음부터 남편이 자연스레 부엌에 섰던 건 아니다.
남편은 나와 결혼하기 전까지 30년 동안을 솜씨 좋은 어머님이 해주시는 집밥만 얻어 먹으며 살아왔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신혼 때는 둘 다 요리를 할 기회가 없었다는 거다.
남편은 회사에서 삼시세끼를 다 해결했고, 나는 주로 아침을 굶고 출근했다가 퇴근 후에 혼자서 대충 먹는 식이었다. 주말에는 주로 배달 음식을 먹었고, 간혹 데이트를 나가면 외식으로 끼니를 떼웠다.
내가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게 된 건, 엄마가 된 이후부터였다. 아이들에게는 건강한 음식을 먹이고 싶어서 손수 이유식부터 만들기 시작했고, 육아 휴직한 내내 두 아이 전담 요리사로 활약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나는 집안일 중에서도 유독 요리가 힘들게 느껴졌다.
열심히 만든 이유식이나 반찬을 아이가 안 먹고 거부하면 속이 상했다. 성취 욕구가 강한 나에게, 요리만큼은 노력 대비 성과가 잘 나오지 않는 분야였다. 새로운 걸 만들어 보려다가도 아이들이 '맛없어'라고 할까봐 덜컥 겁부터 났다.
나에게 요리란, 매번 실패를 경험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일 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요리 자체에 부담을 느끼는 편이라면, 남편은 나와는 달랐다. 요리에 있어서만큼은 실패와 상관없이 계속 도전해 보려는 의지가 강했고, 생산성 있는 취미라며 요리를 은근히 즐기기까지 했다.
심지어 우리 남편, 굉장한 미식가이다. 미각이 어찌나 발달했는지, 혀끝에 살짝만 대봐도 음식 재료를 거의 다 맞춘다. 후각은 또 어찌나 예민한지, 아주 미세한 비린내나 잡내도 알아챌 수 있다.
그러니, 요리를 하기에는 남편이 나보다 더 제격인 사람이었다. 그렇게 우리 집 간판 요리사 타이틀은 슬며시 남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아싸라비아 콜롬비아~!!)
하루종일 육아만 하던 시절의 나에게 '남편이 해주는 밥'은 끼니 이상의 큰 의미가 있었다. 아이들 보느라 한 끼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나에게 남편이 만들어 주는 밥은 소중한 위로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차려주는 밥을 먹는다는 그 자체가 좋았다.
내 끼니를 걱정해주고 챙겨주는 이가 있다는 게 눈물 나도록 기뻤다.
사랑과 정성으로 내 밥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생각에 고된 육아도헤쳐 나갈 힘이 생겼다.
그 때부터 남편이 해주는 밥은 늘 따뜻하고 맛있었다. 나는 점점 더 '남편이 해주는 밥'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갔다.
내가 복직을 해서 다시 맞벌이 부부가 되었을 때는 집안일을 재분배할 필요가 있었는데, 내가 남편에게 요구한 집안일은 단 한 가지였다. "주말에 밥 하기"
여기서 잠깐! 맞벌이 부부일 때 평일에 내가 한 일을 간략히 읊자면,
두 아이를 깨우고 아침을 먹이고 씻기고 옷 입히고 머리 묶이고 어린이집과 유치원으로 각각 등원시키고 부랴부랴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자마자 각각 하원시키고 놀이터에서 실컷 놀리고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고 장 봐다가 저녁밥 해서 먹이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아이들 씻기고 놀아주고 책 읽어주기 정도...? ㅠㅠ
아이들이 8시쯤 자려고 누우면, 그제야 남편이 퇴근해서 집에 오는 게 평일의 루틴이었다 ㅜㅜ
이렇게 빡세게 5일을 보내고 나면, 나는 주말만이라도 밥하기의 수고로움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다른 건 안 바라니, 오로지 주말의 밥하기만 남편에게 맡겼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아온 우리 부부였다.
그러다 올해, 처음으로 남편이 육아 휴직을 하게 되면서 집안일을 다시 분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 왔다! 제주로 이사 오기 전부터 남편과 집안일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는데, 이번에도 내가 남편에게 바란 건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밥 하기, 그러나 이번에는 주말만이 아니라 매일 밥 하기!"
남편도 협상 결과에 별 불만이 없는 눈치였다. 왜냐면 밥 하기 외의 모든 집안일은 내가 맡기로 했으니까. 나는 속으로 너무 기뻐서 만세를 불렀다! 그 정도로 나는 요리가싫었던 모양이다.
솔직히 일 년 동안 제주에서 살게 된다는 단순한 사실보다, 내가 밥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현실적인 내용이 훨씬 좋았다. 제주에 가면 매일 삼시세끼를, 남편이 해주는 밥만 얻어 먹으면 되다니! 그 곳은 진정한 파라다이스였다.
제주에서 산 지 4개월을 꽉 채운 지금 시점에 중간 점검을 해 보자면, 남편은 매일 밥 하기를 매우 충실히 잘 해주고 있다. 덕분에 나는 매일 남편이 해주는 밥을 얻어 먹는 호사를 누리고 있지요..^^
남편이 제주 집을 구할 때 첫 번째로 원한 조건이 바로"고기를 구울 수 있는 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마당이 있는 주택을 선택해서 살게 되었고, 덕분에 남편은 언제든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울 수 있었다.
구워주는 고기 종류는 꽤 다양하다. 소갈비살을 양념해서 구워주기도 하고, 돼지 립 바베큐를 해주기도 하고, 두툼한 목살이나 오겹살을 맛있게 구워주기도 하고, 폴드포크를 만들어 줄 때도 있다.
하나 같이 너무 맛있어서 기절...♡ 남편이 구워주는 고기는 '어나더 레벨'이다.
남편이 수고해주는 덕분에 우리 가족은 캠핑 온 기분으로 자주 숯불 바베큐를 먹고 있다. 아이들은 학교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집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게 보이면 "아빠가 고기 굽고 있다!!!!" 하면서 우다다다 신나게 달려와서 먹방을 시작한다.
우리 집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재미, 제주 일년 살이 동안 충분히 누리고 가야지!
하교하고 온 어린이들을 반기는, 아빠표 숯불 바베큐!
날이 더워져서 뒷마당으로 옮겨 간 고기 맛집! 우리 남편 더운데 고기 굽느라 고생이 많아유~
아이들 원픽은 아빠가 해준 돼지 립 바베큐!!! 먹고 나면 다음에 또 해달라고 아우성인 요리^^
오일장에서 사 온 고등어도 숯불에 구워 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 ㅠㅠ
남편은 분식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다. 떡볶이도 너무나 맛있게 만들어 주고, 곁들이로 군만두도 서비스로 꼭 올려준다. 맛잘알 남편 덕분에 꿀조합으로 음식 먹는 재미를 알게 된 나 :)
라면도 남편이 끓여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국물 라면은 기본이고 볶음면이나 비빔면, 짜파게티도 남편이 만들면 환상의 맛으로 레벨업이 된다.
예전에 나 혼자 밤에 몰래 라면을 끓여 먹은 적이 있는데, 남편이 해준 그 맛이 안 나서 엄청 속상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요새는 나 혼자 라면 끓여 먹을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고, 남편이 끓여줄 때마다 맛나게 얻어 먹으며 물개 박수를 친다.ㅎㅎㅎ
남편이 해주는 떡볶이와 라면... 토핑 듬뿍 ㅠㅠ 사랑 듬뿍 ㅠㅠ 넘나 맛있다지요...
남편이 또 기가 막히게 잘하는 요리는 '파스타'이다.
겨울에 제주로 이사 오자마자 성산 바다 쪽에 있는 조개 잡이 체험장을 가자고 하더니, 딸들과 어찌저찌 조개를 캐왔다. 나는 너무 춥고 힘들어서 근처 카페에 피신을 가 있었고^^; 그 때 남편이 직접 캐온 조개로 봉골레 파스타를 해줬는데... 캬! 사먹는 파스타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맛이었다.
최근에 또 파스타 생각이 났는지, 이번에는 남편이 나더러 같이 조개를 캐자고 했다. 조개를 많이 캘수록 지난 번처럼 맛있는 봉골레 파스타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신이 나서 열심히 조개를 캤다.
제주 바다에서 직접 캐온 조개로 만든 봉골레 파스타... 그저 빛입니다...♡
직접 캐온 조개로 봉골레 파스타 만들기 1탄... 조개가 적어서 그냥 껍질째 토핑을 올렸다던 남편!
조개 부자가 된 우리!! ㅎㅎ 조개 살만 다 발라내서 조개 듬뿍 봉골레 파스타로 만들어 냠냠^^
지난 봄에 열심히 꺾어 온 고사리로 처음 남편이 만들어 준 음식은 '고사리 갈치 조림'이었다.
오일장에서 사 온 통통한 갈치도 당연히 맛있었지만, 양념장이 깊숙히 베인 고사리가 숨겨진 치트키였다. 직접 캐와서 그런가, 고사리가 어찌나 쫄깃하고 향긋하던지! 아이들도 너무 맛있다고 순삭한 고사리였다.
남편이 만들어 준 고사리 갈치 조림.... 이거 정말 밥도둑입니다!
남은 고사리는 삼겹살을 구울 때, 돼지 기름에 볶아서 같이 먹었는데! 그 또한 너무너무너무너무 맛있었다. 육지에서는 사서 먹어 본 적도 없는 고사리를, 제주에 와서 기똥차게 아주 잘 먹고 있다.
우리가 제주 자연에서 직접 얻은 재료 + 남편의 금손 요리 실력 = 기절할 만큼 맛난 음식
이 공식을 조개와 고사리에서 절실히 깨달은 뒤, 최근에는 집 앞 바다에 나가서 아이들과 보말을 잔뜩 캐왔다. 바위에 붙은 삿갓조개도 많이 캐와서, 뜨거운 물에 삶은 뒤침핀으로 속을 파내는 건 내가 하고, 그걸로 보말죽을 만드는 건 남편이 했다.
남편표 보말죽 역시? 성.공.적...♡ 내장맛이 어찌나 녹진하고 맛있던지! 보말죽 가게에서 팔아도 손색 없을 정도였다. 이러다가 계속 보말 캐와서 죽 만들어 먹는 거 아닌지 몰라 ㅎㅎ
집 앞 바다 돌 위에서 보말과 삿갓조개를 잡던 나와 아이들 모습 ㅎㅎㅎ 삶아서 그냥 파먹어도 맛나요!!
지난 주말과 그 지난 주말엔, 2주 연속으로 내 친구들 가족이 각각 다녀 갔다. 내 친구들은 놀러 온대고, 우리 집 밥 담당은 남편(?)인데... 내가 친구들에게 밥을 따로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잘 수 있는 방만 내어 줄테니 알아서 놀다 가라고 말해 두었고, 친구들 가족은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해결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착한 나의 남편은, 내 친구들과 그 가족을 위해서도 기꺼이 요리를 해주었다.
저녁에 시간이 맞는 날에는 폴드포크 요리를 해주거나 숯불 돼지 바베큐를 해서 대접했고, 아침에는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어 조식처럼 내어주는 식이었다.
남편이 먼저 마음을 내어서 내 친구들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크게 감동 받았다. 친구네 가족들도 남편이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정말 고마워 했고, 맛있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내 지인들에게도 맛있는 걸 해주는 남편은, 진짜 우주 최강 멋진 남편이 아닐 수가 없다!
폴드포크와 양배추 코울슬로를 직접 만들어 대접한 남편 / 버거번에 넣어 폴드포크 샌드위치로 만들어 먹어도 맛나요^^
나중에 육지로 돌아간 뒤 누군가가, 제주 일년 살이 중 내가 누린 최고의 혜택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밥 하기 면제권'을 얻은 것이었다고 말할 테다.
남편이 해주는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어서 감사한 제주에서의 나날들 :)
덕분에 나는 살도 무럭무럭 찌고 있고, 그래서 남편이 나를 '흑돼지'라고 놀리기도 하지만! 나는 여기 제주에서만큼은 남편의 밥을 얻어 먹는 행복한 흑돼지로 살아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오늘도 남편은 식사 시간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부엌에 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두근두근,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남편에게 이렇게 말을 걸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