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하던 각자의 원룸에서 신혼 집으로 이사를 한 것부터 치면 12년의 결혼 생활 동안 벌써 5번째 이사였는데, 이번이 단연 1등으로 힘든 이사였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사하는 과정은 꼬박 이틀이 걸린다. (이번에 처음 알았다!)
1차 이사날인 토요일에는 육지의 원래 살던 집에서 이삿짐이 모두 나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비행기를 타고 사람만 먼저 이동했다. 잡아 둔 숙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다음날, 2차 이사날인 일요일에 새벽 배를 타고 이삿짐도 건너 왔다.
제주 집 이사가 시작된 건 오후 3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제주의 비는 바람과 함께 360도로 내린다더니 정말 그랬다. 이사를 위해 사방으로 열어둔 문과 창문으로 빗물이 쉴 새 없이 들이쳤다. 남편은 결혼 12년 동안 잘 써온 오래 된 가전제품과 가구들이 비에 젖을까, 노심초사였다.
“이사하는 날 비 오면 잘 산대요~ 제주에서 행복한 생활 되십쇼!”
이사가 끝난 저녁에는 폭우 수준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후 내내 비를 쫄딱 맞으며 이삿짐을 날라 주신 이삿짐 센터 직원분들께 정말 감사한 마음이었다. 비가 오면 잘 살 거라는 덕담까지 들으니 제주로 이사 온 게 더욱 실감이 났다.
육지에서 이삿짐 빼던 토요일/ 제주에서 이삿짐 들이던 일요일
제주 집에서의 첫날 밤, 생각지 못한 여러 난관에 봉착해 나는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강렬하게 느껴지는 추위와 습기였다. 아직 커튼을 달지 못한 큰 창문으로 가득 쏟아지던 집 앞 가로등 불빛도 내 잠을 방해하기는 마찬가지. 아, 한 가지 더! 저 창문 너머로 사람이 불쑥 나타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자꾸 눈을 떠서 확인하게 된다는 것.
나는 평생을 아파트에서만 살아 본 뼛속까지 도시 여자이다.(남편은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배를 잡고 웃지만…^^;) 어쨌거나 주택에 사는 건, 나로서는 매우 생소한 일이었다.
나와는 달리, 남편은 주택에서 가족과 쭉 살아 본 경험자였다. 회사 입사 후에는 원룸에서 짧게 자취도 했는데, 그 곳도 주택의 1층이었다. 남편은 나랑 결혼하고 나서부터 아파트에 살기 시작했으니, 주택에서 산 경험만 30년이었다.
그러면 왜 주택 생초보인 나는 굳이 제주에서 살 집으로 주택을 선택했느냐!
우리 부부가 본격적으로 집을 알아본 건 작년 11월. 남편이 제주에서 살고 싶은 집으로 제시한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집
2. 아이들 각자의 방이 있어야 하므로 최소 방 3개 이상
그 뿐이었다^^;
제주 집은 육지와는 달리 1년간의 세를 한 번에 내고 들어가는 연세로 구해야 했다. ‘오일장 신문’이라는 제주 집 매물만 올라오는 사이트를 이용하면 된다고. 여기까지 정보를 준 남편이 나에게도 틈틈이 ‘오일장 신문’에 올라오는 집들을 살펴 보란다.
그런데 사이트에 올라오는 정보만 봐서는 전혀 감이 오질 않는 거다. 집의 위치도, 마을 주변의 느낌도, 심지어 집 내부의 방 배치 같은 것도 친절히 알려주지 않는 느낌. 사진 몇 장과 두루뭉술한 설명만으론 부족해서 정보들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직접 제주에 다녀 오기로 했다. 아이들은 시부모님이 데려 가서 봐주시기로 했고, 우리 부부만 2박 3일의 일정으로 제주 집 구하기 출장(?)을 가게 된 것.
어..? 그러고 보니 결혼 12년만에 아이들 없이 남편과 나, 둘만 가는 첫 여행이었다.
나는 24살 되던 봄에 처음 제주도를 가봤다. 그 때 함께 제주도에 갔던 사람이 지금의 남편(그 땐 남자친구). 첫 아이를 낳고 두 번째 제주도 남편과 함께, 둘째 아이까지 낳은 뒤 세 번째 제주도 남편과 함께. 네 번째 제주만 친정 엄마, 남동생이랑 다녀오며 살짝 외도(?)를 했고.
다섯 번째 제주는 다시 남편과 함께! 집을 구한다는 성격이 짙은 출장성 여행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신혼 여행을 가는 것처럼 설레고 좋았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의 여행이 떠올라, 처음 제주를 갔던 24살의 나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다섯 번째로 만나러 가게 된 제주, 바다 위로 반가운 비양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참 신기하지, 목적이 달라지니까 전혀 다른 것들이 보였다. 유명하다는 곳만 다니던 이전의 제주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제주였다. 제주는 마치 조심스럽게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는 듯 했고, 내가 알던 제주와는 달라서 몹시 낯설었다.
아니다, 제주는 늘 그 모습 그대로였을 텐데. 내가 자세히 들여다 보는 노력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에 쫓기며 잘 알려진 곳만 들러 인증샷을 찍고, 겉모습만 훑어 보고는 ‘제주 다 봤다!’ 하며 우쭐해져서 돌아가곤 했었지..
이번에는 제주 여행 때마다 한 번도 찾아간 적 없는 낯선 동네들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것도 최대한 천천히, 구석구석, 수많은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이름 없는 조용한 바닷길을 걸으며..
남편과 걷다가 우연히 마주한 풍경들, 제주의 아름다운 돌과 하늘과 바다.
몇 군데 마을과 집들을 둘러 보고 나니, 우리가 살고 싶은 집의 조건들이 조금 더 선명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1. 아이들이 다닐 초등학교가 가까운 집 (걸어갈 수 있으면 더욱 좋고)
2. 아파트가 아닌 단독 주택 (남편이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야 하므로)
3. 너무 외따로 떨어지지 않은 한적한 시골 마을의 집 (외딴 집은 무섭더라)
4. 도서관이나 운동할 만한 곳이 차로 10분 거리 내외에 있는 집 (책을 좋아한다)
5. 한라산 가까운 집 말고, 바다 가까운 집 (해안가 마을이 훨씬 따뜻하더라)
11월의 제주 출장에서 얻은 소득은 이게 끝이었다. 우리가 살 집의 조건 구체화.
그리고 이 과정에서 2번 조건으로 주택을 구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되었다. 주택 생초보인 내가 제주에 와서나 주택에 살아보지 언제 살아보겠냐 싶기도 했고, 솔직히 설레기도 했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주택 살이에 대한 로망은 항상 있었으니까^^
그러다 12월, 드디어 육지의 우리 집이 월세로 나가게 되었다. 집을 내 놓은 지 두 달 만에 얻은 쾌거였다! 월세로 들어오실 분의 이사 날짜까지 잡아 두고서야, 맘껏 제주 집을 알아볼 여유가 생겼다.
다시 한 번 ‘오일장 신문’ 사이트에 올라온 연세 매물들을 뒤지기 시작! 처음 후보로 찜한 집에 연락해 보니, “이미 나갔어요~” 하시는 게 아닌가..ㅠㅠ 무려 이틀을 기다린 뒤 받은 대답이었다.
실망하기를 잠시, 다음 후보로 올린 집에서 “직접 보러 언제쯤 오시겠어요?”를 듣게 되자, 이 집마저 놓치게 될까 싶어 마음이 급했다. “내일 당장 갈게요!!!!!”를 외치고 부랴부랴 비행기표를 끊었다.
이번엔 1박 2일간 나 혼자 제주 출장이었다. 다시 시부모님 찬스를 쓰기엔 죄송했고, 남편은 아이들을 봐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 남편은 웬만큼 이상한 게 아니라면 이왕 제주까지 간 거, 계약까지 하고 오라는 큰 임무를 나에게 맡겼다.
그런데 나는 부동산 일 처리에는 영 자신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이사는 다 남편이 계약하고 돈에 관련된 일 처리를 담당해 왔기 때문. 이사 때마다 내가 뽐낸 재주는 단 하나 뿐이었다.
‘우리 가족이 살기 좋은 집’을 한눈에 알아보는 재주.
나에게는 다행히 친정 엄마 찬스가 남아 있었다. 50대에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대학의 부동산학과를 전공하고 졸업하신 분이 바로 우리 엄마였다.
나는 엄마께 전화를 걸어 당장 내일 제주에 집 보러 혼자 가게 생겼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여전히 열정과 사랑이 넘치는 엄마, 당장 본인 비행기표도 끊으라고 하시며 딸의 조력자가 되길 마다하지 않으셨다.
덕분에 나는 김포 공항에서 출발, 엄마는 김해 공항에서 출발! 멀리 떨어져 사느라 자주 못 만나던 우리 모녀가 오랜만에 제주에서 재회를 하게 되었다. 제주 공항에서 엄마와 얼싸 안으며, 좋은 집을 구하게 될 거라는 엄마의 무한 응원을 받으니 예감이 좋았다.
역시나, 직접 보러 간 집은 마음에 쏙 들었다. 옥상에 올라가니 야자 나무 사이로 일렁이는 푸른 바다가 보였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기대하지도 않았던 한라산마저 보였다. 됐다, 바로 여기다!
뒤도 돌아볼 것 없이 계약을 마쳤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남은 시간은 짧고 굵게, 엄마와의 제주 여행을 즐겼다. (고마워요 엄마^^)
내가 첫눈에 반한 옥상뷰! 맑은 날도 흐린 날도,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바다와 한라산^^
그렇게 계약한 지 두 달만에 이사 와서 살게 된 집이 바로 이 집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생각했던 조건을 다 만족시키는 집에 살게 되었는데, 정말 감사할 일이고 운이 좋았다.
다만 주택에 사는 것은 생각보다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남편 말고, 나만^^;)
우선, 이사 첫날 밤에 이불마저 축축하게 느껴진 엄청난 습기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제주 집 주인분이 두고 가신 제습기 2대는 처음부터 풀 가동! 그래도 조금 역부족이라 급히 당근 마켓을 통해 제습기 1대를 더 데려와야 했다.
제습기 없이 만 35년을 살아온 내가 여기 와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
제주에서는 당근 마켓에 올라오는 족족 제습기가 빠르게 팔려 나간다는 것이었다. 손 빠른 다른 사람에게 제습기를 10개 넘게 뺏기고(?) 난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간발의 차로 채팅을 1등으로 걸며 겨우 제습기를 구할 수 있었다.
그만큼 제주에서는 제습기가 필수 가전이었다. 이사 오던 날부터 일주일 내내 비가 와서 더욱 더 제습기가 효자 아이템 노릇을 한 건 말해 뭐해.
첫날 밤에 아무리 보일러를 세게 틀어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 오들오들 떨며 잠들었던 건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6개월 정도 비워져 있던 집이라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이삿짐 들어오는 내내 창문을 열어 둬서 집안 곳곳에 찬 공기도 스며 있었다.
주인 분이 가끔 오셔서 머물 때도 방 2개는 아예 보일러를 잠가 두셨다고! 그래서 안방과 큰 아이 방은 온기가 돌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문제 또한 며칠이 지나니 적정한 수준으로 데워져서 해결은 됐는데, 아파트 살 때 만큼의 온기를 바라는 건 사치였다.
육지의 아파트에 살 때는 자다가도 덥다며 입고 있던 잠옷 소매를 걷어 올리거나 이불을 다 차고 자기 일쑤였던 우리 집 아이들. 여기 살면서는 도톰한 잠옷을 스스로 꺼내 입는 것도 모자라 이불까지 꼭 덮고 잔다. 신기한 건 아파트 살 때보다 훨씬 춥게 생활하는데 아이들은 아직 감기에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는 거다.
적당히 춥게 자는 것도 괜찮고, 추우면 보일러 온도를 높일 게 아니라 옷을 껴 입어야 한다는 걸 알아가는 중이다. 나는 지금도 극세사 잠옷에, 후리스 점퍼를 껴 입고, 수면 양말을 신은 채 이 글을 쓰고 있다.
캄캄한 우리 집 앞을 환하게 비춰주는 고마운 가로등에게, 괜히 내 잠을 방해한다며 성질 부리던 것도 잠시. 암막 커튼을 달고 나니 눈 부셔서 못 자던 것도 해결됐다. 사실 커튼을 열고 자면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도 보여서 운치 있고 참 좋은데.. 커튼이 창문 틈으로 느껴지던 외풍까지 적절히 차단해 주니, 잘 땐 필수로 쳐야 한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혹시 사람이 들여다 보는 건 아닐까 무서웠던 것 역시, 커튼으로 다 가려 버려 괜찮아졌다. 사방으로 문과 창문이 있어 언제든 도둑이 들 것 같은 무서움도 문 단속을 잘하고 자는 것으로 해결했고. 집 앞으로 사람도 거의 안 다니지만, 우리 집에 관심 가지는 사람도 전혀 없다는 걸 알아가는 중. ㅋㅋㅋ
그러니 이제 이 집에 정 붙이고 살 일만 남았다.
다행히 이사 오던 날에야 처음 이 집을 둘러본 남편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고, 옥상에 올라가 쏟아져 내릴 것처럼 밤하늘에 가득 한 별들을 보며 신나서 소리를 지르던 아이들은 두말 하면 잔소리. 이미 이 집과 사랑에 빠진 모습이었다.
남편과 제주에 미리 답사 와서, 우리가 살고 싶은 집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게 신의 한 수였다. 덕분에 나는 가족들 마음에 쏙 드는 집을 한 눈에 알아 보았고, 당근 마켓에서 제습기를 10번 넘게 놓친 것과는 달리 딱 2번만에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올해, 우리 집이 될 운명이었던 집아! 잘 부탁한다^^ 널 한 눈에 알아 보고 선택한 나의 재주가 어때? 제법 안목이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