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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뽀 Mar 14. 2024

한라산 정상에 오르는 재주

발가락 수술을 받은 내가 고관절 수술을 받은 아이와 한라산에 올랐다.


이삿짐 정리는 대충 끝났지?
우리 다음 주 화요일에 한라산 가자! 예약 완료했어~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제주로 이사 온 지 딱 일주일 만에 해가 나서 잔뜩 신나 있던 날, 이삿짐 정리가 일주일 만에 끝나 드디어 해방감을 느낀 주말에 맞은 날벼락. 난데없이 시작된 남편의 ‘한라산 가자’ 공격이었다.


내 업된 기분은 순식간에 다운되었고, 내 머릿속 경고등에는 빨간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내 온몸의 세포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비상, 비상, 비상이다! 철통 방어해야 한다!!!’


“한라산? 이 겨울에? 말도 안 돼! 나는 그렇다 쳐, 애들까지 데리고? 불가능이야!!”


강한 공격엔 뭐다? 있는 힘껏 저항하기!




나는 나름 한라산 등반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24살 봄, 첫 제주도 여행의 마지막날 일정으로 야심 차게 계획한 게 바로 ‘한라산 오르기’였다. 내가 제주도까지 왔는데 한라산은 갔다 와야지? 이런 느낌.


함께 여행 왔던 남자친구(=지금의 남편)는 먼저 육지로 돌아간 뒤였다. 동행이 없는 건 아쉬웠지만 혼자서라도 한라산은 꼭 가보고 싶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등산 장비 하나 없이 호기롭게 혼자 오르기 시작한 한라산..


멋모르고 까불다가 큰 코를 다쳐도 아주 제대로 다쳤던 나의 첫 한라산!


한라산은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온 애송이에게 정상으로 가는 길을 호락호락 내어주지 않았다. 한라산 한 번 가보지 뭐, 이런 생각만으로 오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이. 나는 당연히 진달래 대피소까지 가지도 못했고, 겨우 사라오름까지만 보고 오는데도 하루 온종일이 걸렸다.


중간중간 인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때는 큰 공포감도 밀려왔다. 산에 혼자 오른다는 건 말동무가 없어 외로운 것보다, 혹시 내가 여기서 쓰러져도 도와줄 사람이 없을 거란 두려움이 더 크다는 것도 알았다.


하산하는 내내 일반 운동화 속 내 발가락은 발톱이 다 멍든 것처럼 아팠고, 무릎은 구부려질 때마다 욱신욱신 아렸고, 다리는 마치 내 다리가 아닌 듯 감각이 없어 질질 끌다시피 움직여야만 겨우 작동했다.


그런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산을 올라온 내가 등산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가는 것뿐. 힘들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금세 밤이 오고, 나는 이 캄캄한 산속에서 까마귀 밥이 될 것만 같았다.


그저 생존하고 싶어서 젖 먹던 힘을 다해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해가 다 지고서야 출발 지점인 성판악 휴게소에 간신히 도착한 나. 내 입에서는 “하.. 죽다 살았다..”는 말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 후로 한라산은 나에게 다시는 올라가지 못할, 올라서는 안 되는, 사실은 오를 수가 없는, 감히 넘보지도 못할 큰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 후로 제주에 다시 올 때마다 얼마나 경건한 마음으로 한라산을 올려다봤는지 모른다. 우러러보고 있다가도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그 한라산을 나더러 다시 가자고?


벌써 13년이나 됐는데도 첫 한라산에서 느꼈던 두려움과 고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게다가 막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이 되는 두 딸들도 함께 가자고?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나의 어린 딸들에게 내가 느꼈던 고통을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아이들을 핑계 삼아 맹렬히 저항해 본다.


“안돼!! 우리 애들 한라산 갔다간 큰일 나~ 어디 다치거나 중간에 못 걷겠다고 하면 어떡해? 나는 나 하나도 벅차서 애들까지 챙기는 거 절대 못해! 애들도 중간에 못 가겠다고 찡찡댈걸?”


그러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불러 모으던 남편. (미소가 너무 사악하게 느껴진 건 기분 탓이었을까..)


“얘들아, 한라산 갈 거야 안 갈 거야? 엄마가 너희들 한라산 못 갈 거라는데?”


둘째가 자신감 뿜뿜인 얼굴로 먼저 대답했다.


“내가 남한산성도 몇 번이나 가 봤고, 한양 도성 걷기 완주할 때 인왕산도 가 봤는데, 한라산쯤이야!”


첫째가 동생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대답했다.


“맞아 엄마! 제주도 하면 한라산인데 가야지~ 엄마도 아직 정상 못 가봤다면서?”


해맑게 웃으며 한라산에 가겠다고 말하는 두 딸들을 보고 있자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마치 24살에 뭣도 모르고 한라산을 올라가겠다고 설치던(?)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얘들아, 엄마가 가봐서 아는데.. 한라산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고! 진짜 오래 걸리고! 하루 종일 걷기만 해야 되고! 다리도 어마무시하게 아프고! 아무튼 진짜 힘들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자라나는 새싹인 딸들에게 해서는 안될 말이지만.. 그래서 차마 입 밖으로 뱉지는 않았지만... 한라산 등반만큼은 경험해 본 적이 없어 아직 그 무서움을 모른다는 맥락에서, 이 말이 딱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에게는 한라산 등반을 거부할 필살기가 딱 하나 남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회심의 마지막 총알 장전.. 그리고 약간의 눈물 그렁그렁 까지 보태어 발사!!!


“나 발가락 골절됐다가 뼈 붙은 지 한 달도 안 됐어! 이 발가락으로 한라산을 어떻게 가냐고! 거기서 또 발가락 부러지면 여보가 나 업고 내려올 거야? 애들도 있는데?”




그랬다. 나는 작년 12월 31일, 발가락 골절상을 입으며 한 해를 화려하게(?) 마무리했던 사람이다.


집 앞 빙판길에서 발라당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생뚱맞게도 왼쪽 엄지발가락이 부러진 비운의 주인공. 그게 바로 나야 나~ 나야 나~!


1월 한 달 내내 깁스를 한 채 집에만 있다가 2월부터나 조심히 걸어 다니며 이제 막 회복 단계에 접어든 참이었다. 발가락 골절된 지 두 달도 채 안 된 사람이 어떻게 한라산을 올라간다는 말인가!


그리고 사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이번이 두 번째로 겪은 발가락 골절이었다. 6년 전에도 같은 발의 넷째 발가락이 골절되어 수술까지 받은 경험이 있는, 자칭 ‘프로 발가락 골절러’란 말이다!


6년 전 발가락 골절 수술 사진/ 나는 오랫동안 집에서도 휠체어를 탔고 걸어 다니지를 못했으며 후유증도 많이 겪었다 ㅠㅠ




24살의 젊었던 나도 멀쩡한 발가락 10개로 올라갔다가 발가락 몇 개쯤 멍들어서 내려왔는데, 13년 뒤인 지금은 몸도 늙은 데다 심지어 부러졌던 발가락 2개를 지니게 됐으니.. 한라산을 올라가 봐야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그날 일기장에 이렇게 쓰고 있겠지.

‘나의 두 번째 한라산 등반 역시 정상에 오르지 못한 채 처참히 실패했다.’

다른 발가락이 또 부러지는 일만 일어나지 않아도 감지덕지하면서.


“애들은 걱정하지 마~ 알아서 잘 올라갈 거야! 너는 너만 생각하면 돼~ 내가 늘 얘기하잖아. 산이 높아 봐야 하늘 아래 있고,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다고. 중간에 포기하더라도 우리 가족 다 같이 가보는 게 의미 있는 거니까 무조건 가는 거다?”


남편은 속수무책 막무가내였다. 다른 때는 나한테 많이도 져주는데, 이번 한라산만큼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남편의 ‘한라산 가자 공격’은 폭격기처럼 쏟아져, 단숨에 나를 제압했다.




그리고 며칠 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어느새 성판악 휴게소 앞에 서 있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ㅠㅠ


본격적으로 한라산에 오르기 전, 두려움에 떨며 친정 식구들과 친한 친구들에게 메시지도 남겼다. 일종의 유언(?)이었다..ㅋㅋㅋ


‘저는 지금 한라산에 끌려 왔습니다.. 제가 살아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기도해 주세요 여러분..’

 

2024년 2월 27일, 성판악 휴게소에서 오전 7시쯤 출발한 우리 가족




며칠 동안 한라산은 무섭다고, 싫다고, 안 간다고, 못 간다고 반항하던 나에게 남편은 웬일로(?) 등산 스틱을 선물해 줬다. 지금까지 내가 등산 스틱 사고 싶다고 하면 콧방귀를 뀌며 외면하던 남편이었는데!


그리고 이 등산 스틱은 한라산 오르기의 1등 공신이었음을 미리 밝힌다!


이번엔 발가락 보호를 위해 등산화도 처음 사서 신어 보았다. 등산화 역시 내 부실한 발가락을 보호하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해주었다. 나름 방수도 되는 녀석이라, 눈 쌓인 산길을 걷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처음 사용해 본 등산 스틱과 처음 신어 본 등산화가 내 신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장비였다면,

내 정신적 한계를 극복하게 해 준 건 다름 아닌 가족들이었다.


특히 나의 남편! 이제와 말하지만 정말 고맙습니다.. (처음엔 속으로 겁나 욕했지만)


솔직히 인간 대 인간으로 존경을 표하고 싶을 정도로, 그는 한라산에서 엄청난 희생과 인내와 용기와 사랑을 보여주었다. 이런 사람이 나의 남편이라는 게 너무 감사하고 자랑스러웠던..


그와 함께 간 한라산이어서 나는 나의 모든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분신, 나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랑스러운 큰 딸!

아직 만 10살도 되지 않은 그 아이가 나를 한라산 정상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아이는 ‘선천성 고관절 탈구’였다. (요즘에는 발달성 고관절 이형성증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고 함)


태어날 때부터 고관절, 특히 대퇴골두를 감싸는 비구의 발달이 덜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고관절이 빠질락 말락 하는 아탈구 상태였던 아이.. 헌데,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났다는 그 병을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에 처음 알게 되었다.


아이가 어느 날부터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처음 걸음마를 할 때도 이상이 없었고, 유치원 때까지도 잘 걷고 뛰어놀던 아이였다.


혹시 몰라 정형외과에 가서 사진을 찍어 보았다. 그런데, 큰 대학병원 소아 정형외과에 가서 정밀 검사를 해보라는 거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게 아이의 ‘선천성 고관절 탈구’라는 병.


저명한 소아 정형외과 교수님께서 수술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하셨다. 안 그러면 아이는 평생 다리를 절게 될 것이고, 평생 관절염에 시달려야 한다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이는 만 6세의 작디작은 몸으로 수술대에 올랐다. 아이의 배 아래쪽과 왼쪽 허벅지 옆면에는 10센티가 넘는 길이의 흉터가 선명히 새겨지게 되었다.


아이는 가슴부터 발 끝까지 온몸에 통깁스를 한 채로 6주간을 꼼짝없이 누워만 있어야 했다. 깁스를 풀고 나서도 한동안은 집에서 휠체어를 탄 채 생활해야 했고, 학교도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그 좋아하는 체육 시간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그 어떤 운동도 하지 못한 채, 철심을 박아 둔 다리뼈가 잘 붙기만을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아이는 천천히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수술하기 전보다도 훨씬 절뚝거리는 것 같았다. 과연 수술이 잘 된 걸까.. 평생 저렇게 다리를 절면 어떡하지.. 아이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걱정이 되었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나에게 아이의 뒷모습은 늘,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고관절 수술을 받고 가슴부터 발까지 통깁스를 해야만 했던 아이..




아이는 3학년이 되기 전 겨울 방학 때, 다리뼈에 오랫동안 박혀 있던 철심을 제거하는 수술을 또 받았다. 첫 수술 때 생긴 허벅지 옆면의 10센티 넘는 흉터 위로 다시 한번 수술칼이 그어졌고, 같은 자리에만 두 겹의 흉터가 남게 되었다. 덕분에 도톰하게, 더욱 선명히 새겨진 흉터..


초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에, 박혀 있던 철심을 빼내는 수술을 다시 받은 나의 아이..




그 흉터를 볼 때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심정이었다.


그랬던 아이가 한라산을 오르기 시작할 때부터 앞서 나가고 있었다. 같이 가자고 설득해서 나란히 붙어 가는 것도 잠시, 이내 아이는 저만치 내 시야에서 사라져 걷고는 했다. 아이는 확실히 빨랐고, 걸음은 가벼웠다.


중간 어디서부터는 자기보다 두 살 많은 6학년 언니네 가족에 끼여 넉살 좋게 같이 가고 있다고 했다. 휴대폰을 가지고 있던 아이는 중간중간 전화를 걸어 자신의 상황과 위치를 말해줬고, 그나마 걱정을 덜할 수 있었다.


“아빠 어디쯤이야? 나는 속밭 대피소에 도착했어!”

“아빠 여기 사라오름이라는데 여기로 가야 돼? 아니면 진달래 대피소 쪽으로 가?”

“아빠 나 이제 진달래 대피소 도착했어~ 여기서 기다릴게!”


나는 큰 아이를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내 속도에 맞춰 걷는 중이었다. 아이가 엄마인 나에게도 전화를 걸었다는데, 나는 걷는 것에만 집중하느라 휴대폰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받지를 못했다.


남편은 그런 내가 혼자 뒤처지지 않게 내 뒤를 딱 붙어 따라왔다. 가끔은 내 엉덩이도 슬쩍 밀어 올려주며.


우리 집 막내, 귀염둥이 둘째는 나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생각보다 잘 걸었다. 중간중간 쉬었다 가자고 하며, 내 페이스 조절에도 도움을 주었고. 다리는 아프다고 하면서 입은 한시도 쉬지 않고 조잘조잘 떠들어 대던 둘째 덕분에 끝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걸으니 지루한 산행도 재미있게 느껴졌다.




우리 가족은 진달래 대피소에서 드디어 완전체로 만났다.


남편이 묵직하게 메고 온 배낭에는 우리 가족 4명분의 먹거리가 들어 있었다. 내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에도 버거운 나에게는 최소한의 짐만 맡기고, 자기 혼자 무거운 보온병과 여분의 물과 각종 먹거리들을 꽉꽉 채워 메고 왔던 것. (지금 생각해도 좀 멋짐)


남편의 배낭 무게를 덜어주기 위해, 챙겨 온 컵라면과 김밥을 진달래 대피소에서 먹기로 했다. 하염없이 눈길을 밟으며 거친 눈보라를 헤치고 올라온 터라 온몸이 꽝꽝 얼어 있었는데, 따뜻한 컵라면을 먹으니 정말 꿀맛 중에 꿀맛이었다. 아이들도 엄지 척을 하며 허겁지겁 맛있게 라면을 먹었다.


내가 어젯밤에 남편의 부탁(협박)으로 직접 만들었던 김밥도 별미였다. 김밥 2줄을 라면 국물에 맛있게 찍어 먹는 남편을 보니, (어제는 김밥 싸느라 힘들어서 구시렁거렸지만) 김밥을 싼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배를 든든히 채우고, 우리 가족은 최종 목적지인 백록담으로 향했다.


전날 밤, 열심히 만든 김밥 / 성판악 휴게소 도착해서 아침으로 먹고 / 진달래 대피소에서 라면과 함께 냠냠^^




정말, 마의 구간이었다.

지금까지 치고 올라가던 큰 아이도 지치고 힘든 모양인지 걸음이 느려졌다. 덕분에 나는 큰 아이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며 갈 수 있었다. 내 뒤로 따라오던 남편과 둘째 아이는 점점 거리가 벌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백록담까지 큰 딸과 나, 오롯이 둘이서만 오르는 산행이었다. 눈보라가 마구 휘몰아칠 때는 아이가 날아갈까 두려워 아이의 옷깃을 조용히 잡기도 했다.


“힘들지?”


계속 아이 컨디션을 살폈다. 내가 힘든 것보다 아이가 힘들까 봐 그게 더 걱정이었다. 아니, 엄마인 나는 여기서 힘들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높은 산 위에서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아이를 들고 업고 안아서 내려가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없던 힘도 솟아올랐다.


게다가 가끔씩 엄마가 잘 따라오는지 돌아보는 아이의 얼굴엔 해맑은 미소만이 가득했다. 얼굴은 차가운 바람에 발갛게 상기된 채, 힘들다고 할 법도 한데 한 번의 투덜거림도 없이.


아이는 정상을 향해 그저 묵묵히 나아가고 있었다.




아이의 첫걸음마를 지켜보며 물개 박수를 치던 날이 떠올랐다. 그저 한 걸음 내딛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기쁨을 가져다주던 나의 첫 아이였다.


아이가 겁도 없이 달려 나갈 때는 소리치기 바빴다. “조심해! 넘어지면 다쳐!”


그러다가 내 예상을 비껴 나가지 않고 아이가 “쿵”하고 넘어져 “왕~”하고 울면, 정신없이 달려가 안아 올리며 상처 난 곳이 있는지를 살폈다.


아이 몸에 작은 상처만 나도 속이 상했다. 그때는 속상한 마음에 위로해 주기보다는 잔소리부터 해댔다. “그러게, 엄마가 넘어진다고 했잖아!”


그래도 아이는 자신 앞에 펼쳐진 세상이 궁금해 계속해서 달려 나갔고, 그렇게 마주한 세상이 신기해 종종 한 눈을 팔았고, 그러다 기어코 넘어지곤 했다.


엄마에게 더는 잔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는지, 언제부턴가는 넘어지더라도 손을 탁탁 털며 울지도 않고 씩씩하게 일어났다.


그렇게 아이는 수없이 넘어지고 여러 번 아파보며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고관절 탈구 수술을 받았던 건 전혀 자신에게 문제가 안 된다는 듯이. 다시 한 번 거침없이 저 높은 세상을 만나러 한 걸음씩 내딛는 아이의 뒷모습. 그 뒷모습이 너무 장엄해서 경이롭기까지 했다. 한참을 멈춰 서서 아이를 우러러 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이제 내 품 속의 아이가 아니었다. 큰 고난을 마주할 때마다 생을 축복으로 물들이는 힘을 가진 존엄한 인간이었다.


“엄마, 여기 미끄러우니까 내가 먼저 밟아둔 눈 발자국 위만 밟으면서 따라와!”


나라는 보잘 것 없는 존재를 엄마라고 불러주는 사람. 자주 넘어지는 자신의 엄마가 눈길에 미끄러질까봐 발자국을 남겨주는 사람. 그런 든든하고 자상한 사람으로 성장한 나의 딸.


아이는 앞서 가느라 전혀 눈치 못 챘겠지만, 주책 맞은 엄마는 아이의 듬직한 뒷모습을 보며 몇 번을 울컥하고 눈물을 훔쳤는지 모른다.


넘어지니까 뛰지 마라고 아이에게 잔소리 하면서도 정작 자주 넘어지는 건 나였다. 넘어지면 여지없이 부러지거나 크게 다치고 마니까, 그 때마다 너무 아파서 내 아이는 그런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라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올라갔을 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기에, 아이 역시 나와 똑같이 느끼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고통스런 순간들이 모두 ‘한 번쯤 넘어져서 다쳐도 괜찮은’ 무수한 경험들 중의 하나였다는 걸 깨달았다.



고관절 수술 받은 흉터 좀 있으면 어때, 어차피 나는 이렇게 잘 걷고 뛸 수 있는데!

한라산 오르는 게 그렇게 힘든가? 얼마나 힘든지 궁금한데.. 한 번 올라가 볼까?


아이의 얼굴을 공개하고 싶지 않아 그렇지, 아이는 정말 환하게 웃고 있다. 한라산의 설경과 눈보라 속의 아이.




뭐든 해보는 쪽을 선택하는 아이였다. 지레 겁먹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 건 엄마인 나만 그랬다.


아이는 랜덤 초콜릿 상자 속에서 무슨 맛 초콜릿을 고르게 될지 몰라, 기대감에 가득 차 하나씩 꺼내어 먹어 보는 삶을 즐기고 있었다. 달콤한 맛도, 씁쓸한 맛도, 그녀에겐 삶의 다양한 맛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번에 내가 뽑은 초콜릿이 달콤했으면 다음 초콜릿은 조금 씁쓸해도 괜찮을 수밖에. 어차피 내 삶에 주어진 초콜릿은 무궁무진하게 많으니까. 다음에 뽑을 초콜릿의 맛이 궁금하다면 또 하나 꺼내어 먹어보면 되니까.


아이가 한라산을 오르다 말고 문득 나를 내려다 볼 때면, 마치 이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엄마! 엄마도 나처럼 초콜릿 상자에서 초콜릿 1개 꺼내 먹어 봐!
먹어 봐야 그 맛을 알지~ 이번 한라산은 무슨 맛이야?"




우리 모녀는 그렇게 한라산 정상에 나란히 섰다.


말할 수 없이 큰 환희와 성취감이 밀려 들었다. 모든 것이 옆에 있는 큰 아이 덕분이었다. 나에게 ‘쓰디 쓰지만 또한 강렬하게 달콤한’ 맛의 초콜릿을 먹어보라고 권해 준 아이 덕분에, 한라산의 참맛을 느낄 수 있었다.


백록담 표지석과 사진을 찍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뒤로 오들오들 떨며 기다리고 있자니,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안개로 가득해 한치 앞도 안 보였지만, 그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고, 나는 단 번에 알아 차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틀림없는 나의 둘째 아이였다.


“언니~ 엄마~ 나 왔어!”


나는 솔직히 남편과 둘째 아이가 다시 진달래 대피소로 내려갔을 줄 알았다. 혀를 내두를 만큼 마지막 구간이 험했고, 눈보라가 거세서 위험했기 때문이다. 둘째가 진즉 포기를 한 탓에 남편도 같이 내려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대하지 않은 둘째 아이까지 정상에 오른 순간이었다. 이 모든 걸 가능케 해준 나의 사랑, 남편도 함께 등장! 힘들다고 찡찡대는 둘째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데려왔을 남편.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저 빛인 우리 남편!!!


한라산을 오르며 가장 많은 칭찬을 받은 둘째. 모든 사람들이 여기서 만난 최연소 어린이라고 말해주실 정도로, 내가 봐도 둘째는 한라산을 오르기엔 역부족인 나이였다. 그런데 얘는 짧은 7년 인생만에 어른들도 포기하고 돌아가는 한라산 정상에 올라온 것이다.


너 역시도 나보다 훨씬 대단하고 멋지구나!


남편이 나중에 보여준 사진. 마치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는 것만 같았다며... 고생했다 둘찌야..♥




눈보라 몰아치는 한라산 정상에서 우리 가족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내 인생에 강렬하게 기록될 한 페이지. 비록 눈보라 속에 갇혀 백록담은 볼 수 없었지만, 백록담을 보고 안 보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이 곳 한라산 정상에 올라 함께 서 있다는 것, 그게 중요했다.


우리 가족 모두 함께, 한라산 정상 등반에 성공했습니다^^




오후 1시쯤 하산을 시작한 우리 가족은 저녁 6시에야 성판악 휴게소에 도착했다. 무려 5시간의 하산 길. 중간중간 지치고 힘들기도 했지만, 우리 가족이 함께여서 결국은 해낼 수 있었다.


백록담에서 찍은 사진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다는 ‘한라산 등정 인증서’까지 발급 받아 들고서, 우리는 개선 장군처럼 당당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은 좀비 상태였지만)


자랑스런 우리 가족 네 사람의 한라산 등정 인증서^^




그 날 내 일기장에는 두 번째 한라산 등반의 결말이 예상과 다르게 쓰여졌다. 내 인생에 절대 없을 줄 알았던 문장이 마치 훈장처럼 아로 새겨진 기분.


‘튼튼하지 못한 나의 두 발로, 거세게 불어오는 눈보라를 헤치며, 마침내 한라산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작게 덧붙여서 쓴 문장…


‘내 인생에 한라산은 이번이 끝이다!!!!!!!!!!!!!!!!!!!!!!!!’ 

(느낌표만 10개 넘는 게 포인트)


한라산을 다녀온 며칠 동안 나는 무릎이 아려 걸음이 좀 불편했다. 남편은 그런 나의 몸 상태를 매일 살펴 보더니, 내가 좀 괜찮아진 것 같다 싶은 날이었나..? 그 때 또 한 번 난데 없이 '한라산 가자 공격'을 재개했다.


한라산 올라갈 만 하지? 그럼 우리 3월에 또 가자.
나는 제주에 사는 1년 동안 매달 한 번씩 한라산에 갈 거야!
물론 12번 모두 다 너랑 같이^^”


남편이 예의 그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사탄!! 썩 물러 가라!! 한라산은 니나 가라!! 나는 이제 죽어도 안 가!!


하산은 빛보다 빠르게!! 거의 날아서 내려 가던 아이들... 엄마는 그냥 버리고 가렴 얘들아ㅠㅠ
한라산을 다녀오며 브런치에 글을 써 볼 결심도 하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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