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가 나에게 알려준 비밀들
먼저 스스로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말하고, 그다음에 해야 할 일을 하라.
-에픽테토스 Epictetus -
마흔 가까운 나이에 엄마가 되었습니다.
처음 맡아본 ‘엄마’ 역할은 낯설게 느껴졌고, 매 순간 미숙한 것만 같았습니다. 동화 속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육아 속에서 영영 파묻혀 버릴지 모른다는 막막함.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이 자리에 영원히 서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감정들이 휘몰아쳐 왔습니다.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스스로를 온전히 내주었던 경험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엄마라는 역할이 무섭고 낯설기만 했습니다. 나를 온전히 내주고 아이와 함께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 그것이 육아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부모가 된다는 건, 지금까지의 나를 지우고 새롭게 태어나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처음 부모가 되면 누구나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이유로 오래전부터 ‘아이를 기르는 일’에 대한 왜곡된 믿음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작가 시릴 코널리는 아이들이 예술가의 발목을 잡는다며 예술의 적은 "복도에 있는 유모차"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 인생의 첫 6년을 나에게 준다면 내 남은 인생은 가져도 좋다 “
그 말처럼 아이와 함께한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해맑은 아이의 웃음소리, 아이가 하루하루 자라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아침에 일어나 엄마를 찾는 아이의 모습까지. 아이는 그 존재만으로 건조하고, 자를 잰 듯 잘 짜인 일상을 살아가는 어른의 삶을 깨끗하게 지워 버렸습니다. 아이의 시간 속에서 부모가 된 우리는 자연에 가장 가까운 태초의 삶을 만나게 됩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잃어버린 자연 그대로인 날것을 다시 만나게 되는 최초의 경험인지도 모릅니다.
<아이가 가르쳐 준 사랑>
《데일리 대드》작가 라이언 홀리데이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성공의 걸림돌이 되리라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다. 아이들은 우리가 나아갈 삶을 명확하게 해 주고, 거친 세상 속에서 삶의 균형을 지키는 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존재다.’라고 말입니다.
부모가 되면 예상보다 많은 책임을 짊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를 기르는 것을 꺼리거나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며 깨닫게 됩니다. 아이는 우리가 쏟은 노력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아이를 키우며 우리는 다시 ‘아이였던 나’로 돌아갑니다.
아이는 어른이 되며 잊어버린 것들을 조용히 일깨워 줍니다. 삶 속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건 무엇인지. 빠르게 변해가는 숨 막히는 세상 속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사랑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이웃에게 건네는 인사와 미소가 주는 작은 행복들에 대해 알려줍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공기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아이는 우리에게 매일 가르쳐 줍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이에게서 무언가를 배워 나갑니다.
어쩌면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서로 번갈아 안고 안기는 — 사랑스러운 작은 손님을 맞이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아이는 부모에게서 배운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우리가 ㄴ대로 아이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우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이들을 통해 아이가 될 수 있다.
아이들과 우리는 서로 번갈아 가며 안고, 안기기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아이를 안고, 양정욱, 울산시립미술관 2024년 어린이 기획전시 팸플릿 중>
<사소한 순간들>
아이가 네 살이 되었던 어느 여름, 아침밥을 먹던 아이가 물었습니다.
"엄마, 방귀에는 귀가 있다는 거 알아요?"
아이는 엄마는 답을 절대 모를 거라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꾹꾹 참습니다. 잘 모르겠다는 제 대답에 아이는 다시 ‘풉’ 웃음을 참더니 방귀라는 글자에는 '귀'가 들어 있기에 방귀에는 귀가 달렸다고 말하며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러고는 세상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데굴데굴 구르며 웃기 시작합니다. 아이의 모습에 저도 웃어버립니다.
아이가 만들어 주는 이런 작은 순간들은, 작지만 영롱한 새벽이슬처럼 반짝이며 우리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십니다. 오늘도 아이가 남긴 작은 새벽이슬을 곱고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엄마가 된 저는 언제부터인가 아이와 함께했던 작은 순간들을 수집하는 버릇이 생겨버렸습니다. 그 장면이 주는 맑고 포근한 느낌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릅니다.
어릴 적 엄마가 해주시던 따뜻하고 네모난 카스텔라에서 풍기던 달콤한 냄새, 불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던 호떡들, 이기겠다고 주먹을 꼭 쥐고 치던 배드민턴, 오빠와 동생과 땀을 흘리며 약수터에 다니던 기억까지. 사소한 순간에 대한 어린 시절 기억은 마흔이 된 지금에도 황량해진 마음을 데워 줍니다.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이가 주는 이런 작은 순간들이 아이가 전해 주는 가장 큰 사랑이라는 사실을요.
그래서 오늘도 아이가 준 이야기를 기억 주머니에 부지런하게 담아봅니다.
<달리기와 육아>
올해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달리다 보면 앞쪽에서 힘차게 달려오는 러너를 만나게 됩니다. 빨리 달리는 러너의 속도를 바라보고 경쟁심이 들어 저도 모르게 달리는 속도를 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곧 알게 됩니다. 자신의 페이스에서 벗어나 무리해 달리게 되었을 때 오히려 다치거나 본래 달릴 수 있는 거리마저 완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요.
달리기를 시작하며 자신의 속도를 알고, 묵묵하게 정해진 거리를 꾸준하게 달려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순간순간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마음은 아이를 키우면서도 저를 키우면서도 필요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이를 기르며 많은 불안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스스로가 세상에 뒤처지고 있다는 두려움, 또 하나는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늦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습니다.
어느 날 여름날 이 불안한 감정 안에는 저는 없고 오로지 타인들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운 바람이 살짝 불던 6월 오후, 아이 어린이집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었습니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벚꽃 나무가 유난히 많이 심겨있어, 봄이 되면 벚꽃들이 쉴 새 없이 피어납니다. 벚꽃은 이미 졌고, 그 자리에 보라색의 동그란 열매들이 아기자기하게 맺혀 나오고 있었습니다. 제 눈에 벚꽃 나무는 잎을 키우고 열매를 맺으며 이 시간을 견디어 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벚꽃이 지고 더 이상 그 누구도 화려하지 않은 벚꽃 나무를 바라보지 않지만, 벚꽃은 묵묵히 열매를 맺으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속도와 빛깔로 꽃을 피우는 그 자리에 열매를 맺는 벚꽃 나무처럼 우리의 인생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벚꽃 나무도 꽃이 피는 시기와 열매를 맺는 시기, 봄을 기다리는 시기가 있듯이 우리 모두 각자 주어진 속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저의 속도와 방향대로, 아이는 아이의 속도와 방향대로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산다면 누구나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다만 그 순간이, 그 시간이 각자 조금씩 다를 뿐이었습니다.
조금 늦게 핀다고 조급해할 필요도, 포기할 이유도 없습니다.
꽃이 언제나 자기의 시간에 피어나듯. 그저 묵묵히 걸어가다 보면 우리가 품은 꽃은 피어날 것입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이 순간을 음미할 수 있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조용한 묵묵함이 가지는 위대한 힘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마흔 육아를 응원하며>
초보 엄마로 좌충우돌하는 모습과 그 안에 숨겨진 따뜻한 감촉을 글에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아이의 시간 속에서 함께하며 느꼈던 둥근 감정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글을 쓰며 현실에서 지나쳤던 기억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어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덕분에 아이와의 사소한 순간들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저와 같은 속도로 육아의 여정을 지나고 있으신 분들, 혹은 이제 육아의 여정을 시작하고 계신 분들께 이 글이 작은 위로와 다독임이 될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쁠 것입니다.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불안한 마음들을 내려놓고 조금은 편안한 마음이시길. 사랑을 가득 담아 다시 오지 않을 아이와의 지금 시간을 충분히 누리시길 바랍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_^)
2025년 6월 11일
육아도 하는 변호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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