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쓰는 아빠 육아일기
나는 삶의 지향점이 높은 사람이었고, 아빠는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아빠도 알고, 나도 안다.
내가 지향점을 아무리 낮췄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매번 낮췄지만. 아빠는 채우지 못했다. 우리는 그만큼 어려웠었다.
'한을 쌓아놓고' 산다고 부모에게 평가받은 내가,
그 부분에 대해 아빠를 원망하지 않는 이유는 아빠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다. 방향이 어디인지 모르고 달렸을 뿐이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달렸는지는 나도 봤다. 아빠의 나이에 나는 아빠처럼 열심히 달릴 수 있을까? 그것도 잘못된 방향을 향해서?
아빠 역시 나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래서 별 불만이 없이 살아왔다.
아빠는 얼마나 속상했겠어.
그런데 얼마 전, 부모님과 셋이 식사를 할 때의 일이다.
아빠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다"라고 고백했다.
나는 필요한 것을 다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은 필요하다고 말을 하면 최선을 다해 구해줬다.
"뭘 해주고 싶었느냐? 우린 어지간한 것은 다 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내가 아빠에게 건넬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 부모님은 우리가 가지고 싶다고 조르지 않았던 것도 고맙다고 했다.
엄마는 내 기억 저편의 이야기를 퍽 생생하게 꺼내셨다.
내가 유치원 때 친한 친구네 집에 엄마와 초대를 받아 가게 됐는데, 친구 방에 침대와 캐노피를 본 내가 얼굴이 완전히 굳어서 집에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유치원생인 나는 집에 가자는 말만 반복했고, 엄마는 그게 아직까지도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그때는 캐노피를 사줄 수도 없었지만, 사달라고 말도 꺼내지 못하는 여섯 살의 내가 엄마는 마음이 아팠던 듯하다.
*
그런데 아빠의 기억은 그와 달랐다.
남동생은 '컴퓨터 하나만 사주면 만족하는 애'로
반면 나는 '자기 것을 빼앗긴다는 느낌을 견디지 못하는 애'라고 평가했다.
빼앗긴다는
느낌.
느낌이 아니라 빼앗긴 것이었다. 실로 수탈과 약탈의 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내 인형, 내 장난감, 내 연필, 내 지우개.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내게서 아빠는 남에게 줘 버릴 것을 참 잘도 찾아냈다.
*
가족의 생일을 챙기는 것이 여유임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나의 부모님은 항상 여유가 없었다. 언젠가 딱 한 번. 아빠가 한 손에 인형을 들고 왔다. 인형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지금도 대체 그 정체가 무엇일까 고민하게 만드는 '옷걸이'였다.
술에 취한 젊은 아빠가, 팬시점에 들어가서 '딸 생일인데 여기서 제일 비싼 것을 주세요'해서 사온. 그 가게의 재고 처리였을 그런 비싸고 쓸모없는 인형 모양의 옷걸이. 하지만 나는 그 애매한 인형을 처음으로 아빠에게 받은 선물이라 꽤 귀중하게 여겼다.
어린 나에게 생일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해지는 날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그 날은 무엇이라도 위안할 수 있어서. 몇 년이 지나도 그 인형은 내 방을 지켰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아빠의 눈에 띄어서 "이거 대체 어디서 난 거야?"라는 짜증과 함께 사촌 동생에게로 넘어갔다.
사촌동생들이 내 물건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냥 들고 있거나 "언니 이게 뭐야?"라고 물어보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면 멀리서 보던 아빠는 "그거 가져가"라고 하셨다. 나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단 한 번도 내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
아빠가 꺼낸 그때의 기억이 다시 날 괴롭혔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가진 것만큼은 꽤나 아끼던 나에게는 상실감이 큰 일들이었다. 나는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지만 아빠는 다시 그 화제를 꺼냈다.
"우리 어머니가 저랬어"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이 내게서 문득문득 보인다며 아빠는 질겁하고는 했다. 할머니를 닮았다는 말은, 우리 집에서는 그다지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결국 나는 아빠에게 한 마디 하고 말았다.
"그건 내 거였잖아. 내 거를 아빠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남에게 준 것은 잘못된 거지"
아빠에게 사과를 기대했는가?
아니다. 아빠는 나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자식과 겨루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또 조용히 져줬어야 마땅했다.
아빠에게 져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역시 부모가 되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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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파르르 떨면서도, 웃으며(미소로 보이고자 하는 애매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좋겠다 너? (비난할 수 있는) 기회 잡아서"
다시 나는 말을 삼켰다. 다만 아빠에게 눈빛으로 책망했다.
1초간의 짧은 눈흘김에 원망을, 경고를 담았다.
'그만 해'
*
생각해보면 아빠의 평가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나는 욕심이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다. 사실은 가지고 싶은 것도 많았다.
몇 가지는 용기 내서 말해 보기도 했지만, 생산 인구인 아빠에게 닿기도 전에 엄마 선에서 잘렸다.
당시 소년소녀 합창단에 오디션을 보러 가고 싶다고 했더니, 엄마는 면허가 없어서 널 데리고 다닐 수 없다고 했다.
플루트를 배워보고 싶다고 했더니, 엄마 옆집 애가 플루트 전공이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서 안된다고 했다.
학교에서 6만 원짜리 합창 특활부에 보내줄 돈이 없어서 안된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 배우는 것조차 욕심 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팠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모든 선택지들이.
하지만 내 아픔이 부모에게 더 큰 아픔이 될 것임을 알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견뎠다.
노래나 악기를 배우기 전에, 쿨하게 포기하는 법을- 아니 그렇게 보이는 법을 배웠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욕심나지 않는 척.
그렇게 내 호불호에 무지한 어른이 됐다.
그런데도 아빠는 나를 욕심 사나운 애로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하면서도 나 자신보다도 부모님을 걱정하던 아이에게 조금 가혹한 평가가 아닐까?
*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식사는 계속됐다.
엄마는 내 기분을 살폈고, 그런 엄마의 눈치를 살피던 아빠가 나에게 일상적인 대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아무런 훈계적 목적이 없는 일상적인 대화.
어렸던 내가 아빠의 화를 풀기 위해 던지던 시답지 않은 농담들을 아빠가 내게 던졌다.
나는 인자로운 부모처럼, 내 감정을 배제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아빠와 함께 아무런 가치 판단이 없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는 매우 피로해졌다. 우울증 환자들이 그렇듯 잠으로 도피했다.
저녁 식사를 갓 마친, 아주 이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