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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드 세상에서 Off, 나에게로 In

하루쯤은 핸드폰은 멀리 두어도 좋아

by 체리

새해 다양한 목표 중 하나는 이것이다.

한 달에 하루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날


일을 핑계로 온갖 미디어에 노출되다 못해 절여져 있는 수준의 일상을 사는 나에게는 이 다짐은 곧 ‘온라인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그러니까 내가 온통 시선과 관심이 쏠린 그리드의 온라인 세상에서 벗어나 비로소 나에게로 집중하는 날 가지는 것이다.


아직 의욕이 한창인 1월 첫 번째 주말을 빌어 이런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단출한 목표인 듯했지만, 나에게는 제법 큰 결심이 필요했다.

갑자기 거래처에 일이 터져 연락이 오면 어쩌지?
온라인 세상에 너무나 큰일이 벌어져 나만 모르게 되면...?

곱씹을수록 터무니없이 사소한 문제여서 비웃음 비슷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내일은 정말 핸드폰 (거의) 없이 살 거야


혹여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이 결심이 흐려질까, 연인에게도 가족에게도 단단히 말을 전해뒀다. 이런 단단한 다짐 때문일지 밤늦도록 쉬이 잠이 오질 않았다. 내일이면 보지 못할 영상과 자극적인 이야기를 몰아보다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잠에 들었다. 그 탓에 어느 때보다 찌뿌둥한 몸으로 일어났다. 대신 자기 전 메신저며 SNS의 알림을 꺼둔 탓에 한참을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는 동안 핸드폰의 알림 창이 고요했다. 습관처럼 열게 될 뻔한 노란색 아이콘과 보라색 아이콘을 애써 무시했다.


오후 10시 조금 넘어선 시간, 제법 늦은 시간인데 아직도 온 세상이 컴컴한 느낌이었다. 복층에 놓인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아래층 창에 시선을 두자, 눈이 오고 있다. 그것도 아주 펑펑 아름답게. 내가 인지하는 한 제대로 된 눈만 셈하면 올해 두 번째 눈이다. 크리스마스 무렵 눈이 와주길 그렇게나 바랐는데, 나의 로그오프 데이에 이렇게 행차해 주시다니.


곱게 내리고 있는 눈을 무시하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다시 소파에 누워본다. 누워있는 공간만 침대에서 소파로 바뀌었을 뿐이다. 창문이 잘 보이도록 보통 보온을 이유로 꽁꽁 쳐두는 커튼도 시원하게 걷어 버렸다. 창에서 드는 웃풍 때문에 발끝이 시려 잘 쓰지 않던 담요도 꺼내 덮는다. 높다란 창 밖으로는 여전히 눈이 나풀나풀 나린다.



세상이 제법 고요하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지금 창을 연다면 눈이 내리는 소리마저 한 낱 한 낱 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그러한 종류의 고요는 익숙지 않아 노래를 틀어보려다 핸드폰,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속에 온라인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한 나는 스마트 TV를 켤 수도, 핸드폰의 유튜브 앱을 켤 수도 없음을 깨닫고 풀이 죽었다.


온라인으로 노래는 틀어도 되지 않을까?

나만의 타협을 하려던 순간 뽀얗다 못해 잿빛이 된 먼지가 켜켜이 쌓인 LP 플레이어로 시선이 향한다. 저렴한 모델이지만 클래식한 디자인과 색감이 마음에 들어 산 것. 하지만 그마저도 자랑글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소위 말하는 사짜들이 몰려들어 ‘이런 싸구려 모델로는 LP를 듣지 마라. 이딴 건 추천하지 마라’ 따위의 날카로운 말들을 쏟아내어 상처를 받고 묵혀둔 지 제법 되었다. 그런 말들을 마주하기 전까진 찬란하게 아름답기만 한 제품이었는데 그 말들을 마주한 이후로는 영 아쉬운 공산품으로만 느껴졌다. 그게 한 5년 전쯤이었나, 그 이후론 소품처럼 집 한 구석에 박아두었다.


오랜만에 잿빛 먼지를 마른 휴지로 쓸어내고 플레이어 속에 숨어있던 LP판을 그대로 틀었다. 마침 클래식이 흘러 나온다. 구태여 다른 음악을 찾기보다는 오늘은 이 음악으로 족하기로 한다. 절대 귀찮아선 아니고 오늘 날씨에 어울린다. 전날 받아본 지인의 책을 펼쳐 들었다. 마음을 좇아 홍천의 깡깡 시골에 터를 잡고 집을 지은 이의 이야기였다. 그 글을 써내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봐 왔던 터라 모두 아는 이야기였지만 이것들이 꿰어져 하나의 거대한 서사가 되어 다가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비록 나는 서울의 작은 방에 누워있지만, 그녀의 드넓은 여정을 멀리서 지켜보는 기분이라 활자를 꿀떡꿀떡 읽어 삼켰다. 내가 감히 부러워할 수도 없는 깊이와 서사를 가진 이의 글이었다. 평소 같으면 이 책을 읽는데도 몇 번이고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했을 것이다. 로그오프 데이에 그녀의 글을 몰입해 읽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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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시간 집중해 책을 다 읽고 나니 다시금 적막이 찾아왔다. 홀로 덜컥 덜컥 잘만 돌던 LP판도 제 몫의 연주를 마친 지 한참 되었다. 끔벅끔벅 천장을 바라보며 뭘 해야 할지 고민해 본다. 일 생각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일이 아니면 내가 무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더라, 한참을 고민하다 가방 속에 넣어둔 자기 계발서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이미 몇 시간 활자를 읽은 탓이었는지, 전날 늦게 잔 여파였는지 몇 장 읽지 못하고 피곤이 몰려왔다. 다시 복층 계단을 터덜터덜 올라가 온열매트를 켜고 따뜻한 낮잠을 청한다.



그래, 이것 역시 제대로 된 Off인 것 같아.


2시간 정도의 긴 낮잠을 잤다.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라니, 정말 사람 사는 일은 먹고-자고-싸고만 해도 바쁜 것 같다. 양배추 한 줌과 단백질 셰이크로 대충 요기를 해결한다. 이제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 오늘은 눈도 뽀얗게 내렸겠다, 보통이면 사람들로 뽀글뽀글 가득할 우리 동네도 오늘만큼은 조용할 것 같아 그 호사를 누리고 싶었다. 주말이면 종종 찾는 카페에 선호하는 자리를 잡고 저녁잠을 걱정하며 디카페인 커피를 시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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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단잠에 빠져 제대로 펴지 못한 자기 계발서를 연다.

<데일 카네기의 성공대화론>

나는 어릴 적부터 발표를 잘하는 이들을 부러워했다. 평소엔 잘만 말하다가도 공식적인 자리에선 말을 더듬고 절고 마는 탓에 일종의 공포증(Phobia) 같은 걸 겪었다. 서른을 훌쩍 넘겨 더 이상 내 부탁을 들어줄 윗사람도 없고 물러날 구석이 없다고 생각이 든 탓에 올해는 이 책을 꼭 읽어봐야겠다 생각한 참이었다. 또 두어 시간쯤 몰입하여 책을 읽는다.


평소에 대단히 시끄럽고 난잡한 영상들을 봤던 것도 아닌데, 핸드폰과 인터넷 없는 세상은 제법 고요하다. 그래서 책에 놓인 활자들이 하나하나 내 뇌로 쏙쏙 들어오는 느낌이다. 카페인지라 주변 소음은 가득하지만 나 홀로 고요한 방울 속에 놓인 듯 했다. 팔로우하고 있는 인플루언서 중 매일 1시간쯤 로그오프 후 책 읽는 시간을 가지는 이가 있었다. 그 시간이 주는 평온함과 몰입에 대한 예찬을 조금쯤 깨달았다. 그건 마음을 뒤덮었던 흙탕물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깨끗한 물만 위로 떠오르는 생경한 감각이었다.


매끼 몸이 원하는 건강한 음식을 먹고, 필요한 수면량을 온전히 채우고, 번잡한 마음 없이 평온하게 하루를 보내는 일. 거창한 듯 보이지만 막상 실천하면 별 것 아닌 그런 일, 그런 일들을 하며 올 한 해의 신호탄을 던진 듯 해 뿌듯하기만 하다.


나의 새해다짐이 또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한 달에 하루쯤 - 아니 반나절만이라도 핸드폰은 멀리 두어도 좋아


나의 Off 데이를 빛낸 독립서적
<네가 원한다면 망설일 필요 없어>
작가 박규리
관련 정보 https://brunch.co.kr/@muakyung/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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