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 아니 어린 시절은 소설만 읽었던 것 같다. 내게 접근할 수 있는 범주가 소설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소설을 읽기가 힘들어졌다. 다른 책들을 읽어야 한다는 변명도 있었지만, 작가가 이야기하는 소리에 내가 너무도 몰입되어 함께 고통이 전해져 오자, 나의 삶의 무게만으로도 벅찼던 시절이라도 된 것인지 너무도 후유증이 심했다.
그러다 이 책의 문장 하나 때문에 읽게 되었는데, 저자의 사진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여류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전통적인 오류 사고를 시행한다. 무라카미의 가벼운 느낌이 스쳐간다고 생각할 때쯤 다른 기법으로 훅 들어온다.
단숨에 훅 읽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으나 일부러 아껴가며 읽었다. 덕분에 몰입도가 좀 줄었으나 그래도 여운은 오래 즐길 수 있었던 듯.
소설이 주는 묘미(?)에 대한 논평을 제대로 들었던 토요일 밤. 그 논평을 해 준 분의 소설도 조만간 마음 단단히 부여잡고 도전해 보고 싶어 졌다.
“여행의 이유”는 마음 부여잡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한데 ㅎㅎ
2019.06
발.췌.
“신혜숙이 열쇠를 돌려서 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코앞까지 훅 밀려들었다. 고여 있던 과거의 시간들이 문이 열린 틈에 앞다퉈 망각 속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눈이 시려서 손등으로 몇 번 문질렀다. 이상하게도 상실감이 들었다.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의 과거의 점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앞으로 어떤 점들을 밟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인생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너 같은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점들이 모두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네 인생은 몇 번이고 달라지리라. 인생의 행로가 달라진다는 말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 자체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너의 취향이 무의식, 즉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과거의 어떤 우연한 점에 의해서 결정됐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그냥 수전노처럼 돈이나 벌면 행복에 겨울 사람들까지도 사랑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버지를 볼 때마다 나는 사랑이라는 건 전염병과 같다고 생각했어. 전염병이 사람을 가리지 않듯이 사랑도 모두에게 가능하니까. 태양만 있고 햇살은 없는 것처럼. 온기가 없는 불꽃처럼.
원래 그 자리는 고독의 자리였어. 혼자 존재하는 자리. 불과 이십여 년 전만 해도 고독은 흔했지만, 지금은 디지털 기기에 밀려 일상에서 고독이 사라지면서 고독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어. 21세기에 우리에게 허용된 고독의 공간이란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 루트, 혹은 코타키나발루 고급 리조트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요즘 세상에는 값싸게 즐길 수 있는 고독이란 게 없어. 돈을 지불하지 않는 고독은 사회 부적응의 표시일 뿐이지. 심지어는 범죄의 징후이기도 하고. 예를 들어 선생들은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서 지내는 학생에게서 자살이나 학교 폭력의 가능성을 읽고.
주도권은커녕 버티기도 힘들 만큼 윤경은 외로웠다. 자신의 생각과 달리 값싼 고독은 여전히 널려 있었다. 고독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로서 행동했지만, 그 우리 안에서 각자는 저마다 고독했다. 고독한 인간은 반드시 다른 인간을 향해 손을 내밀게 돼 있다. 윤경은 오랫동안 다른 사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데 그 깨달음을 이용했다.
그러고 보면 그 시절엔 분노가 외로웠지, 고독은 그다지 외롭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이 되면서 뜨겁고 환하던 낮의 인생은 끝이 난 듯한 기분은 들었다. 그다음에는 어둡고 서늘한, 말하자면 밤의 인생이 시작됐다. 낮과 밤은 이토록 다른데 왜 이 둘을 한데 묶어서 하루라고 말하는지. 마찬가지로 서른 이전과 서른 이후는 너무나 다른데도 우리는 그걸 하나의 인생이라고 부른다.
낮의 인생과 밤의 인생, 그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저마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하기로 예정된 사람들처럼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이라는 걸 한다. 그중에서 누군가와 영영 이별하고, 또 누군가와는 평생 같이 살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가 연애담을 늘어놓던 카페의 구석자리는 우리 다음에 태어난 여자들의 차지가 됐고, 대신에 우리는 깊은 밤, 전화를 붙들고 앉아서 인생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을 떠들어댔다. 하지만 삼십 대 중반을 넘기면서 그런 나날들마저도 지나가고 전화벨도 더 이상 울리지 않으면서 하나의 인생이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그제야 우리는 깨달았다. 서쪽으로 오렌지빛 하늘이 잠기는 동시에 반대편에서 역청 빛 물결이 밀려드는 어스름의 풍경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그게 종말의 풍경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날마다 하나의 낮이 종말을 고한다. 밤은 그 뒤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공간이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에야 우리는 그 일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있다. 모든 균열은 붕괴보다 앞선다. 하지만 붕괴가 일어나야 우리는 균열의 시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붕괴가 일어난 뒤에야 최초의 균열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우리와 그 아이의 사이에는 심연이 있고, 고통과 슬픔은 온전하게 그 심연을 건너오지 못했다. 심연을 건너와 우리에게 닿은 건 불편함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