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을 자고 있던 토요일 오전, 아빠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입덧은 어떻냐고 물으시는 아빠에게 최근 2주 입덧이 심해 고생해서 체중이 조금 빠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가만히 들으신 아빠는 블루베리가 입덧에 좋다며 농장에 가고 있으니, 이따 전화하겠다고 하시고 끊으셨다. 아빠가 사시는 곳 근처의 블루베리 농장에서 몇 상자 보내주시겠거니 생각하며 다시 자고 있었는데, 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두 시간 후 도착하니 신혼집 주소를 보내라는. 너무 놀라 잠이 홀딱 깨버렸다.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던 남자친구에게 급작스럽게 아버지의 방문을 알렸고, 한 번도 방문하신 적 없는 집을 보여드리기 위해 다급히 대청소를 시작했다.
아버지 도착 시간에 맞춰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더니 두 시간 반을 직접 운전해서 갖다 주신 블루베리 8 상자가 앞 좌석에 실려있었다. 주차도 하지 않으시고 바로 가시려는 제스처를 취하시길래 집 구경 해보시라며, 커피만 드시고 가시라고 붙잡았지만 아빠는 딱 3분 만에 주차장을 떠나셨다. 어안이 벙벙한 나와 8kg의 블루베리를 든 남자친구는 서로만 가만히 바라보았다. 매우 충동적이시고 성질이 급한 부분이 있으신 아빠는 예전에도 종종 이러신 적이 있으셨기에 따로 전화로 다시 한번만 더 붙잡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블루베리는 알이 매우 크고 싱싱했다. 내색은 안 하셨지만 나의 임신이 아빠는 매우 좋으신 느낌이다. 입덧하는 딸을 위해 두 시간 반을 넘게 운전해서 블루베리를 주시고, 또 혹여 부담이 될까 후다닥 되돌아가시는 아빠의 사랑을 나는 알 것 같았다. 양쪽 집안의 첫 아이가 될 차차는 얼마나 더 큰 사랑을 받게 될까?
내가 5년 동안 같이 살았던 사촌언니와 언니의 친한 친구는 종종 같이 어울려서 놀곤 했다. 언니의 친구 비교적 최근에 둘째를 출산했는데, 내 임신을 알고 신생아 때 필요한 옷과 물품들을 가득 전달해 줬다. 옷 중에는 내 눈에 익숙한 옷들도 있었다. 바로 사촌언니의 조카들을 키울 때 입었던 옷들이 섞여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내 기억에 선명한 민트색 GAP의 후드티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눈물이 샘솟았다.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조카 미엘이가 어렸을 때 입었던 옷이었다. 당시 미엘이는 아마 3~4살 정도로, 한창 귀여울 때였는데 이때 나는 매일매일 같이 살고 있으면서도 미엘이가 웃으며 내게 안기면 심장이 떨렸었다. 내 생에 이렇게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은 처음이란 느낌이었는데, 그 느낌이 나 혼자만의 느낌이 아닌, 쌍방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전혀 이방인일 수 있는 나를 나의 조카는 기꺼이 받아들여줬고, 그 믿음을 토대로 나는 세상을 맞설 용기가 생겼다. 지금의 나를 키운 건 80% 나의 조카들이다.
언니가 가고 한참 동안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펴고 접으며 손으로 매만졌다. 차차가 건강하게 태어나서 이 옷들을 꼭 입었으면 좋겠다. 조카 셋과 언니 친구의 딸 둘, 총 다섯 명의 웃음과 행복과 건강이 서려있는 이 옷들을 차차가 반드시 입었으면 하는 소원이 생겼다. 차차가 태어날 세상에 너무 많은 사랑들이 서려있어 감사하고 행복하다. 차차야 건강하게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