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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May 26. 2021

첫 출근

홀로 북치고 장구도 쳐야하는 슈퍼맨

   출근 첫날, 관리사무소장 자리에 앉아 가장 먼저 본 서류는 전임자가 작성해놓은 업무 인계인수서였다. 과거 직장 생활하던 시절을 돌아보면, 업무인계인수 작업은 전임자와 후임자가 만나 대화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전임자는 담당업무의 개황과 민원 등 현안을 설명하고 후임자는 궁금한 점들을 수시로 물어보며 업무의 전반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내가 부임하기도 전에 떠나버린 전임자는 도망가듯 퇴사했다는 소문이 일각에서 나돌기도 했다. 어쩌면 그가 인계인수서를 작성해놓은 것 만해도 다행인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주택관리사라면 당연히 해야 할 기본 소양이라는 건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서류 커버에 큼직하게 그려진 사각형 결재란에는 전임 소장의 인장만 덜렁 찍혀있을 뿐, 인수자 결재란은 공란으로 비어 있었다. 누가 후임자로 올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오면 알아서 인장을 찍으라는 뜻일 것이다. 혹시나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임명장을 받던 날, 나는 본부장한테 전임자가 사무실에 나와서 직접 업무를 인계하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었다. 하지만 내가 부임하기 불과 5일 전 이미 퇴직하고 떠난 그는 끝내 사무실에 다시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본부장이 나의 요청을 그에게 전달하였는지, 그가 연락을 받고서도 거부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된 마당에 굳이 알아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직원들에게 물어서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고 조심스럽게 전화를 했다. 며칠 전까지 그가 일했던 자리에 새로 부임한 후임자라고 소개하며 몇 가지 물어보고자 전화했다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는 별로 내키지 않다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다. 몇 마디의 의례적 인사말을 나누다가 하루 이틀 사무실로 와줄 수 있겠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냐며 물어볼 것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를 달라고 무성의하게 대답하였다. 그러더니, 죄송하다며 지금 손님과 얘기 중이어서 통화를 오래 하기 어려우니 나중에 전화하자며 끊었다. 사실 그런 태도가 그가 보여준 전부였다. 필요하면 언제든 전화하라지만, 막상 전화하면 지금 바쁘니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는 식이었다. 무성의하기 짝이 없고 부실한 태도로 순간을 외면하려는 웃기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비록 입주민들에게 밉보여 그만뒀다 할지라도, 주택관리사이고 관리소장이라는 같은 처지인 사람끼리 동병상련할 법도 하련만, 그렇게 나오는 반응을 보고 나는 그가 아직 덜 익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나는 두 번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그럴 일을 아예 만들지 않음으로써 들고 있던 인연의 끈을 놓아버렸다. 거의 쫓겨나듯 퇴직했다니 이쪽 사무실에 정나미가 뚝 떨어졌을 법도 하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국 나는 부임한 지 한 달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도록 전임자가 성의 없이 대충 만들어놓은 업무인계인수서를 만지작거렸을 뿐, 궁금한 점들에 대하여 직접 설명을 들을 기회는 없었다. 그로 인하여 낫 놓고 기역(ㄱ) 자도 모르는 상황을 한동안 감내해야 했다. 나는 그가 만든 서류에 인수자 인장을 찍지 않았다. 훗날 누군가가 나에게 왜 날인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가 일방적으로 작성해놓은 서류만 전달받았을 뿐, 업무를 제대로 인계받지는 못했노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입주자대표회장이 관리사무소 건너편에 있는 회장실로 와달라고 불러서 얼른 뛰어갔다. 감사라는 분과 같이 밤색 가죽 소파에 나란히 앉은 채로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회장은 소파 앞 탁자에 도시락을 다섯 개 정도 쌓은 듯한 엄청 두툼한 책자 모양의 서류를 펴놓고 있었다. “아~따, 주택관리 업무 읽어볼 게 참 많네!” 하고 나를 쳐다보며 살짝 웃었다. 얼핏 보니 공동주택관리 매뉴얼이라고 적힌 제목이 보였다. 아파트 관리업무를 살펴보고 있는 듯하였다. 새로 뽑힌 동대표들 임기가 이제 막 시작됐다며 나에게 이 아파트를 잘 관리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전임 소장 얘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일을 엉망으로 해놓고 도망쳤다며 큰 소리로 분개하였다. 위탁관리업체 본사에 처벌을 요구하고, 그런 사람이 다시는 이 바닥에서 소장으로 일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며 단단히 벼르는 모습이었다. 사장에게 문서를 띄우겠다고도 하였다. 거품을 물고 독설을 토해내는 회장 바로 앞에서 그런 말을 듣고 있자니 움찔하고 긴장도 되었다. 당신도 잘못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의 말이나 다름없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회장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나의 두 눈을 노려보듯 쳐다보며 말했다. “소장님, 낼모레 회의를 합시다”. “예~? 아~, 예, 그렇게 하시죠...^^” 첫 출근을 하자마자 회의를 하자는 주문을 받고 보니 내심 황당했다. 나는 마지못해 그렇게 대답하며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메모 준비를 하였다. 회장은 긴급 임시회의라면서 안건을 하나씩 차례로 불러주기 시작하였다.      



     

   PC 화면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무수한 아이콘들을 살펴보며 회의자료 양식부터 찾아야 했다. 사실 전임자가 사용한 컴퓨터에 어떤 파일이 어디에 들어있는지 파악하는 일이 중요한 데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니어서 더욱 답답하였다.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다. 시간이 넉넉지 않은 상황이라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하였다. 기술자 경력 21년 차라고 자기를 소개했던 관리과장을 불러서 회의자료를 작성해보라고 했다. 아무리 기전 업무가 전문이라지만, 그 정도 경력이라면 행정능력도 상당히 쌓았을 것이라고 짐작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회의자료는 전임 소장님이 직접 작성했다며 미적거리기만 하고 서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회의자료 양식이나 자료가 모두 소장님 컴퓨터에 들어있어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잘라 말했다. 처음부터 귀찮은 일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다는 태도로 보였다. 어쩌면 새로 온 소장을 그렇게 길들여 놓아야 자신이 편할 거라는 생각을 관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계속 밀어붙여서 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 경력이면 공부해서 관리소장을 하지 그러냐고 했더니, 관리소장 해봐야 책임이 크고 골치만 아프니 월급 조금 덜 받고 편하게 가기로 했다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그의 자리에서 돌아 나오는 길에 출입문 쪽을 향해 앉아서 민원 대응 업무를 겸하고 있는 경리 대리에게 다가가 말을 붙여보았다. 입사 경력 막 2년이 지나 제법 관록이 있는 그녀는 누구보다도 사무실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이렇게 촉박한데 회의자료를 빨리 만드는 방법이 없겠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소장님 컴퓨터 공용문서함에 지난달 회의자료가 있을 것이라고 포인트를 콕 찍어 알려주었다. 그날 이후, 경리 대리는 내가 뭔가를 물으면 그때마다 반드시 모종의 해법을 제시할 줄 아는 센스 있는 인재로 각인되었다.  



    

   캐비닛을 뒤지고, 서류철을 찾아 넘겨보며 서둘러 회의자료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과장도 불렀다가 때로는 대리도 부르고, 서무직원도 부르는 등 눈에 핏대가 오르도록 심혈을 기울여 안건을 하나씩 차례로 완성해나갔다. 비록 독수리 타법이지만, 내가 PC를 치는 속도는 제법 빠른 편이다. 결국 문서를 기획하고 워드(word) 작업을 하는 일은 모조리 소장 혼자 직접 다 해야 했다. ‘홀로 북 치고 장구도 치고, 완전 독박이네!‘. 독백이 절로 나왔다. 직원 관리 잘하고, 일을 적절히 배분하는 등 리더십을 발휘하면 소장 노릇 할 만할 걸로 생각했던 나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느낌이어서 허탈하기도 했다. 친구들은 소장이라는 자리가 부하들이 가져오는 서류에 도장만 찍어주면 되는 것 아니냐며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그건 실상과는 사뭇 거리가 먼 얘기였다. 고향 어머니께 안부 차 전화를 드리면, 역시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말씀을 하시기도 해서 웃곤 했다. 내 나이가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관리소장이라는 자리는 밖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달리 그렇게 한가하게 일하는 곳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혹시 나만 그런 것인가 싶어서 주변의 다른 관리소장님들께도 물어봤다. 이구동성으로 그게 사실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빈틈없이 일을 챙겨야 한다고 했다. 어느 고수 소장이 나에게 이 일을 하는 목적이 뭐냐고 퀴즈를 내듯 물은 적이 있었다. 정답을 찾느라 고심하며 머뭇거리는 나를 오래 기다리지 않고 그는 직격탄을 날리듯 말했다. 그건 과태료를 맞지 않는 것이라고 정곡을 찔렀다. 사실 자칫 방심하면 그런 함정에 빠지기 쉬운 일들이 많다. 정확하고 성실하게 처리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주변의 어느 직원도 의존할 수 없는 처지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해야 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관리소장은 언제나 바쁘다. 미국의 제46대 대통령인 조 바이든(Joe Biden) 대통령은 나와 취임 동기다.ㅋ 같은 날(2021.1.20.) 이곳 관리소장 임명장을 받았다...ㅋ. 그러니 취임 100일도 같이 맞이하였다^^. 소장은 대통령보다 훨씬 더 바쁘다. 직접 처리해야 하는 일만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정년 퇴직 전 회사원으로 일했던 시절과 비교해보면, 업계에서 일하는 것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 더 분주하게 사는 것같다. 아마도 살아오는 동안 마땅히 경험하고 했어야 할 일들을 다 하도록 하기 위해 신이 나를 이 길로 오게 한 건 아닌지 모른다. 그 일을 감당하는 관리소장은 확실히 슈퍼맨(Super Ma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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