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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Oct 04. 2021

맞고 할래, 그냥 할래?

아침부터 현장으로 가는 이유

   출근길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 시간은 나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거주자들의 직장 출근이 거의 마무리되는 즈음이다. 내가 조금 더 이른 시간에 정문에 도착하면, 그들의 출근길 러시아워(rush hour)를 본다. 직장인, 학생, 엄마 손 잡은 어린이까지 저마다 갈 곳을 향해 바삐 집을 빠져나가는 입주민들로 분주한 시간이다. 그들과 다름없이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집을 오갔던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그와는 정반대로 마치 역주행하듯 대세를 거스르며 하루를 시작하는 요즘 나의 일상은 사뭇 생소하고 어색하며 이례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기분이라면 보통은 어떤 설렘이나 짜릿한 맛이 느껴질 법도 한데, 그보다는 오히려 약간의 긴장감이 대신 자리를 잡는다. 유감이다. 아마도 매일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갖가지 유형의 민원이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정확한 자가 진단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나는 기왕이면 그 긴장감이 긍정적이고 건강한 감정이기를 바라며 하루를 시작한다.

    



   사무실에 들어서면 어젯밤 당직을 선 기전 반장님들을 가장 먼저 본다. 약간은 기운이 빠져 쳐진 표정들이다. 대체 뭘 보는 건지 각자 자기 자리에 앉은 채 PC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안녕하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밝게 인사하며 그들 앞을 지나 내 자리로 들어간다. 간밤에 별일 없었다는 간단한 보고를 듣고 싶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반장님들은 아무 말도 없이 잠깐 일어섰다가 자리에 다시 앉았다. 물론 별일 없었고, 그러니 따로 보고할 사항도 없다는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실망스럽다. 그러면 안 되지. 저 사람들은 군대도 안 갔다 왔나? 관리사무소 경력도 적지 않을 텐데 아침 출근 시간 소장과 눈동자 맞추는 순간을 그렇게 맹물처럼 허비하고 말다니, 내면의 불만지수가 자꾸만 높아진다. 저런 모습이 나오는 건 나이가 너무 든 탓이라는 지적이 맞는 것일까? 오랜 세월 개념 없이 일해 온 타성에 젖은 결과일까? 어느 쪽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모두 다 해당하리라 넘겨짚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성싶다. 며칠 전, 역전의 용사처럼 경험이 풍부한 서 과장이 나에게 조심스럽다며 전한 말이 떠올랐다. “소장님, 기전 반장 나이가 너무 많으면 같이 일하기 힘듭니다. 혹시 일하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큰일 나요~~“ 물론 그것은 본연의 일 이외에도 이것저것 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 그것을 감당할 만한 체력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인정! 같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한다는 서 과장의 일침은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나는 곧 만능 카드키를 서랍에서 꺼내 목에 걸었다. 각 동 현관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 공고문, 게시물 등이 제대로 붙어있는지 내부를 점검해볼 참이다. 책상 옆 옷걸이에 걸어둔 하얀 모자를 집어쓰며 관리사무소를 나선다. 단지를 한 바퀴 돌아보기 위해서다. 어제 기록해둔 메모 노트와 인터넷 홈페이지를 미리 살펴본 뒤다. 혹시 새로 올라온 댓글은 없었을까. 입주민 동정을 가장 먼저 확인하고, 나의 할 일 목록(to-do list)을 들여다보며 우선순위도 점검하였다. 관리책임자인 소장은 간밤 사이 아파트 단지에 별일 없이 안녕한지, 오늘 빠뜨리지 않고 꼭 챙겨야 할 민원 요소는 없는지 몹시 궁금하다. 당직자는 마땅히 소장의 이러한 갈증을 일부라도 풀어줬어야 했다. 알고 보면 하루 이틀 되풀이되는 일이 아닌데, 그런 잘못된 관행을 시정하지 않고 그대로 방관해 온 나의 책임이 먼저다. 반성하고 자책하고 시정해야 할 사람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나다. 그렇더라도 지나간 일일랑 과하게 자책하지는 말자며 내일을 기약한다. 어떤 경우든 소장이 직접 현장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일은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개략적이라도 먼저 단지 점검을 마치고 나면 좀 더 개운한 기분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어서 좋다. ”그것도 모르고 자리에 앉아만 있는 거냐“, ”일을 그따위로 하면서 월급만 꼬박꼬박 받아쳐먹고 있냐“며 전화기 속에서 증오심 가득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던 어느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지금도 가시지 않고 상처 난 그대로 귓전에 박혀있다. 그 후, 언제 어디서 그런 불만이 다시 튀어나올지 몰라 불안하기만 하다. 그래, 그분도 뭔가 불만과 이유가 있어서 전화기를 들었을 것이다. 안 참으면 어쩔 건데? 그러니 이번에도 내가 참아야 한다. 그런 불만들이 쌓여 어떤 식으로든 나를 더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아침에 현장을 가보고 점검하는 일은 그런 민원과 나의 불안감을 사전에 줄여보고자 일부러 맞는 자발적 예방주사인 셈이다. 그렇게 다녀보면, 여기에 와보기를 잘했다는 느낌이 들고 생각은 생산적인 방향으로 작용한다. 과거 직장 다니던 시절, 숱하게 들었던 ‘우문현답’, 우리의 모든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그 말은 여전히 유효하고 실용적이다.      




   오늘은 어제와는 반대로 아파트 단지 동쪽부터 둘러보기로 하였다. 관리사무소 입구에 비치한 출근부에 서명을 마치고 나온 미화원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이제 막 작업을 시작하는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저마다 맡은 구역을 열심히 쓸고 닦으며 하루를 소비하지만, 청소가 불량하다는 지적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알아서 잘하리라는 나름의 기대가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발상일 뿐 성과주의에는 오히려 독이라는 생각을 곱씹으며 발길을 돌린다. 노후화된 캐노피(canopy)의 깨진 틈 사이로 흘러내린 흑갈색 녹물이 중앙계단 여기저기 반점처럼 물들어 있는 현장이 눈에 띄었다. 물론 오늘 처음 발견한 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장에 보수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차차 처리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장소를 이동하는 도중 노란 색깔의 주차위반 딱지가 앞 유리에 부착된 차량이 종종 보였다. 방금 전까지 열심히 활동한 경비원 아저씨들이 남겨놓은 흔적이다. 사무실에 돌아가면, 경비 일지에서 단속 내용을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기울어져 있는 볼라드와 주차 규제봉은 기전 반원이 확인하고 보수하도록 사진을 찍어 관리사무소 단톡방에 올려놓았다.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아보는 동안,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것은 아무 데나 버려진 작은 쓰레기들이다. 깨끗한 인상을 차단하는 결정적 요인이기도 하다. 길바닥은 물론이고 도로와 인도를 따라 길게 심어진 회양목이나 영산홍 나무 사이사이에 슬쩍 버리고 간 양심의 흔적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외곽 청소원 아저씨들이 정해진 루트로 손수레에 빗자루를 꽂고 다니지만, 이런 곳까지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관목 위에 내동댕이쳐져 뒹굴고 있는 콜라 캔과 조경용 조명등 위에 살짝 얹어놓고 간 투명 플라스틱 커피잔을 줍기는 쉽다. 버려진 마스크와 청소 포, 물티슈, 종이 등도 간간이 보인다. 목재 계단에는 과자봉지나 씹고 버린 껌, 담뱃갑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나무의자와 데크 주변, 화단 옆 계단 끄트머리, 그리고 주차장에는 특히 담배꽁초가 적지 않게 버려져 있다. 관목 사이로 손을 뻗어 껌 종이나 비닐, 꽁초를 줍는 순간 문득 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졌다.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 어렸을 적 마당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살피며 쓰레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줍던 아버지의 분주한 숨결이 내 손을 잡아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 아버지의 마음으로 가꿔야 해!’ 버리는 사람 따로 있고, 무심코 그냥 지나치는 사람 더 많을지라도 나는 스스로 줍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실 관리사무소에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도 길을 가는 동안 눈앞에 버려져 있는 잡다한 것들을 보면서도 좀처럼 쓰레기로 인식하지 못한다. 줍기에 앞서 무심코 버리지 않는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 사소한 생각 하나가 단지의 품위를 결정짓는 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점검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기분이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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