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이 들었다는 생각을 부쩍 한다. 불과 얼마 전 일이라고 생각해서 이야기를 꺼냈는데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 이거나, ‘어우, 그때가 어제 일 같다~’ 라고 하는 어른들을 보며 ‘나는 과거에 묻혀 살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던 어릴 적 생각이 생생할 때, 문득 그렇다. 현재 나 또한 그때의 어른들과 같은 느낌을 받으며 그 다짐을 생생히 기억하는 건 어쩌면 그때의 치기어린 마음에 대한 벌일지도 모른다. 나의 소리 없는 다짐에 대한 그들의 소리 없는 예언처럼. ‘너도 커 봐라’
남의 자식은 빨리 큰다더니, 사촌의 딸은 볼 때마다 자라있었다. 그리고 아기 용품도 바뀌어 있었다. 목을 가누지 못하는 아기를 위한 베개에서 아기 쇼파로, 아기를 안는 띠에서 바닥 소음을 줄여주는 아기 매트로의 변화는 아기의 행동반경이 넓어졌음을 의미했다. 거실과 부엌 여기저기를 탐방하는 아기에게 틈틈이 눈길을 주며 우리는 현재의 이야기를 했다. 집값과,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에 대해서, 사촌의 친구들과 명품 가방에 대해, 내가 하고 있는 일과 사촌이 하고 있는 육아의 어려움에 대해, 부모님의 건강과 또 다른 사촌의 근황에 대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재미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긍정적인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우리의 집값 상승보다 다른 사람들의 집값 상승이 더 뼈아팠고, 먼 미래는 고사하고 가까운 미래조차도 불투명하게 보였다. 한 발짝 물러 선 내 눈에는 그렇지 않은 사촌 친구들의 삶은 완벽하게 묘사되었으며, 우리는 서로 누가 더 힘든지 배틀을 하듯 거지같은 일상을 토로했다. 타인의 무릎에서 피가 난다고 나의 상처가 없는 게 되는 것은 아니듯, 사촌의 고민은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감을 주었지만 결국 각자의 고민과 상처는 자신의 것이었다. 긴 이야기의 끝은 거의 항상 공감과 외로움이 묘하게 공존한다.
“청풍 문화재 단지요.”
우리는 지쳤고 무식했다. 찜통더위에 녹초가 되었으며, 스마트폰이 있지 않은 시절 처음 가는 지방에서 무슨 버스를 타야 할지, 역에서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지 못했다. 꽤 즉흥적인 성격의 사촌과 나름 즉흥적이‘었던’ 나는 기차역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타며 뒷좌석에 배낭을 구겨 넣었다.
“여행해요?”
우리는 대학생에게 판매하는 기차 일주일 자유이용권에 대해 설명하고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있노라하고 말했다. 택시 기사 아저씨는 망설임이 없었다.
“버스타고 가요. 택시비 많이 나와.”
‘택시비가 많이 나오면 기사님 입장에서 땡큐 아니야?’라는 생각보다, 짜디짠 여행을 하고 있던 대학생에게는 ‘아?’ 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니까 ‘택시비가 많이 나오면 기차 자유이용권을 사서 여행하는 의미도 없지만, 덥고 귀찮고 기사님 좋은 분 같은데 그냥 타면 얼마정도 나오려나?’라는 내적 갈등을 겪었다. 짧은 시간에 사촌과 시선을 주고받으니 사촌 또한 같은 고민을 하는 듯 했다.
“저기 건너서 ##번 버스 타면 그 앞에서 내려요. 버스 타고 가요. 택시비 10000원도 훨씬 넘게 나와.”
어떤 버스를 어디에서 타야하는 지가 해결되었으므로 우리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내릴 채비를 했다.
“이거 받아요”
뜬금없이 기사님은 투명한 파일에 잘 말려놓은 네잎클로버를 조심스레 두 개 꺼내 우리에게 하나씩 주었다. 우리에게 준 것 말고도 열 몇 개가 더 있었는데 수시로 모아두시는 듯 했다. 그때의 그 네잎클로버는 노트 사이에 잘 끼워 두었다가 서울에 돌아오는 대로 코팅하고 지금까지 소중히 잘 보관했다. 고등학생 시절 쉽게 발견한 네잎클로버를 말리지도 않고 성급히 코팅했다가 망친 기억을 떠올리며.
집에 오기 전 그때 그 네잎클로버와 택시기사님에 대해 사촌에게 이야기 했다. 사촌의 네잎클로버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촌 또한 그날의 일을 생생히 기억했다. 나 혼자만의 기억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우리는 현재의 이야기에서 과거의 이야기로 옮겨갔다. 그제야 좋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기억이 미화된 것인지, 실제로 그 때가 나았는지, 둘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뭔들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