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역 5번 출구로 나오니 예상치 않게 비가 쏟아졌다. 언니에게 전화해서 우산을 들고 나와달라고 부탁할까 하다가 역에서 멀지 않아서 그냥 비를 맞고 갔다. 언니는 전화하지 그랬냐며 돌아갈 때는 클림트의 ‘키스’그림이 그려져 있는 장우산을 주면서 가져도 된다고 했다. 그날에는 비싸고 예쁜 우산을 갖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그다음 날은 링거를 맞을 정도로 아팠고, 그 여파로 그 다음다음 날 있는 아이엘츠 영어 시험을 완전히 망쳤다.
불꽃놀이가 있는 저녁 8시가 되기 20분 전, 가방에 우산과 우비가 있는지 다시 한번 꼼꼼히 살핀 후 호텔을 나섰다. 행사가 열리는 가와구치호수의 오이케 공원 근처에 사람들이 꽤 북적거렸지만 역시 예상한 대로 지나갈 수 없을 정도라던지, 설 자리조차 없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게 내가 굳이 후지산까지 불꽃놀이를 보러 간 이유였다. 저녁이 되면 가와구치코역에서 주변 시내로 가는 버스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서는 차가 있거나 숙박을 해야만 했다. 최대 주차 허용 공간에 주차한 사람들과 근처에서 숙박을 한 사람들만이 불꽃놀이의 관객이 되므로 자연스레 행사 참여 인원수가 적절하게 된다.
나는 가로등 밑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섰다. 호텔에서 나올 때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행사 시간이 다가오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이 있었지만 뒷사람들의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해 노란색 우비를 꺼내 입었다. 내 오른쪽에는 젊은 일본 남녀 넷이 우산을 하나 나눠 쓰고는 셀카를 대략 20번 정도 찍었다. 그 와중에 중국어를 하는 젊은 엄마가 아이 한 명을 가장 앞쪽으로 밀어 보냈는데, 얼마 후에 그 아이의 언니도 추가되었다. 불꽃놀이가 막 시작되자마자 시야에 없었던 그 젊은 엄마가 아이들 옆으로 와서 사진을 찍는 척하며 합류했다. 그런 때가 있다. 좋은 일이 막 일어나려고 하는데 짜증이나 화가 나는 일이 생길 때.
‘난 늦게 왔잖아. 많이 기다리지 않았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일을 순간의 짜증으로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여기 있는 사람 모두 멀리서 와서 좋은 구경 잘하고 싶은가 보다’하고 불꽃놀이에 집중하려고 했다. 불꽃은 호수 중앙에서 가장 많이 터졌고 호수 오른쪽 멀리에서도 터졌다. 클래식이나 잔잔한 노래에 맞추어서 폭죽이 터졌는데 사람들이 쓰고 있는 우산, 왼쪽의 나무, 정면의 가로등이 신경 쓰였다.
[엄마, 나는 비가 오면 좋아. 비가 많이 와서 놀이터 그네 밑에 물웅덩이가 생기면 애들이랑 흙으로 두꺼비집도 만들고, 물이 가는 길을 만들어서 마을도 만들 수 있어. 땅 파다 보면 어쩔 땐 동전도 나와]
서 있는 자리에서 사람들과 떨어져 몇 발짝 뒤로 간 후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혔다. 비로소 불꽃만이 보였다. 그리고 뺨 위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괜찮았다.
마지막으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나왔고 쏟아지는 비를 뚫고 온갖 종류의 폭죽이 하늘 위로 올라가 아낌없이 터졌다. 곡의 끝부분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는 동시에 여러 개의 폭죽이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터졌다. 곡이 끝났을 때 뺨을 타고 내려오는 건 빗물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