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크림 파이
왼손잡이도 아닌 내가 왼손으로 글씨를 쓴다. 단어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하다. 넘어지기 쉬운 문장들을 놓치지 않으려 더욱더 꽉 쥔 연필. 지나온 길을 흘끗 쳐다보면 파도의 문장들이 말을 건넨다.
어쩌다 내가 사는 지역에 친구들이 방문하면, 나는 이 동네에서 가장 인기 있는 디저트 가게를 소개한다. 그런 일이 무척이나 즐겁고 설렌다. 오늘은 A를 유명한 파이집에 데려갔다. 단호박 파이, 라임 파이, 블루베리 파이 등 화려한 옷을 입은 파이들 사이에서 우리는 바나나 크림 파이를 선택했다.
두툼한 파이지에 초콜릿 색 카페트가 있다. 그 위로 동그란 바나나들이 두툼한 커스터드 크림을 덮은 채 누워 있고, 생크림은 뭉게구름처럼 풍성하다. 이 바나나 파이를 먹을 땐 적당히 힘주어 포크질 해야 한다. 포크질을 자칫 잘못했다간 파이지가 사방으로 튈 수 있고 쭈뼛거리며 소심하게 잘랐다간 이도저도 아닌 부스러기들만 매달린다. 왼손으로 쓰는 글씨처럼 포크를 꽉 쥐어본다. 위태위태한 건 파이를 생각하는 내 마음, 파이가 망가질까 조마조마한 내 마음, 혹여나 포크질이 시끄럽지 않을까 하는 내 마음. 위태로운 건 전부 내 마음이었다. 신경질 나서 손으로 들고 와작 씹어 먹고 싶은 마음도 든다. 힘주어 포크질을 한 결과 파이지부터 바나나, 초콜릿, 커스터드 크림, 생크림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갖춘 옷차림처럼 포크에 딸려온다. 크림의 파도가 밀려온다. 부드러운 허리케인. 공중을 떠도는 파이지를 아작 씹어본다. 시작은 불안정했지만 사실 무엇보다도 완벽했던 바나나 크림 파이.
집으로 돌아와 노트에 쓴 왼손 글씨를 펼쳐 본다. 비뚤어진 못생긴 글자들이 왠지 춤을 추는 것 같다. 자세히 보면 박장대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장대비를 맞은 듯 초라한 모습이다. 괜히 그들을 한번 쓰다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