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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흐림

오늘의 마음: 맑음

by 이루고


팔을 쓸어내리며 옷장 문을 열었다. 부드러운 아이보리 빛깔을 가진 후리스를 집어 들었다. 더듬더듬 지퍼를 올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검은 주전자에 물을 붓고 서 버튼을 눌렀다. 뚜껑에 난 세 개의 구멍 사이로 하얀 연기가 새어 나왔다. 손잡이가 달린 갈색빛 유리컵을 꺼냈다. 끓인 물을 절반쯤 채운 뒤, 차가운 물을 살짝 더 부었다. 호로록 한 모금 마시자, '하아.' 탄성도 한숨도 아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슬으슬했던 몸 안으로 따스함이 퍼졌다. 한 손은 손잡이를, 한 손은 유리컵의 온기를 잡고선 방으로 향했다. 창가가 보이는 책상 앞에 앉았다. 창문은 빗방울로 잔뜩 덮여 있었다. 그 너머로 회색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다. 세상도, 방안도. 투둑투둑 빗소리만으로 가득했다.




"아. 아"

카페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천장에 닿을 만큼 커다란 자동문이 열렸다. 따끔거리는 목과 걱정스러운 마음을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아이스카페모카 한 잔이요."


잡음이 뒤섞인 쉰 목소리가 나왔다. 귓속말을 하는 듯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검은 모자를 쓴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목을 움켜잡고 한 글자, 한 글자 입을 크게 벌리며 외쳤다.


"아. 이. 스. 카. 페. 모. 카."


그제야 그녀의 이마 위에 나타났던 세 개의 줄이 사라졌다.



스물다섯 살의 어느 날.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목감기인가 싶어 동네 이비인후과에 갔다. 하얀 가운을 걸친 그는 인후염이라고 했다. 감기약 알레르기가 있던 탓에 감기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하는 일엔 익숙했다. 이번에도 그저 심한 목감기가 찾아왔다고만 생각했다.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떠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던 목감기는 어느 순간, 짐을 더 풀었다. 목소리가 점점 잠기더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학병원 호흡기내과를 예약했다. 의자에 앉아 긴 호스를 코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한쪽 성대가 안 움직이네요. 편측성대마비입니다."


두 개의 성대가 말을 할 때 서로 맞붙어야 소리가 난다. 하지만 한쪽 성대가 움직이질 않아, 두 개의 성대 사이로 말소리가 새어나갔다. 이미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버린 탓에,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했다. 인후염이라고 말하던, 안경 낀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일상은 서서히 달라져갔다.

바로 옆에 앉은 사람에게만 말소리가 닿았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마저 너무 멀었다. 세상의 소리는 작은 말소리를 삼켜버렸다. 지금은 키오스크가 익숙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고, 음식을 주문하는 평범한 일이 점점 어려운 일이 되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사람들은 자주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보다, 무슨 표정을 짓는 지만 신경 쓰였다. 질문을 하는 시간은 사라져 가고, 듣고 있는 시간만이 늘어났다. 그러다 대답 대신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점점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게 되었고, 북적거리는 장소에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서서히 혼자가 되어 갔다.


비가 내리 던 어느 날.

강이 흐르는 다리 위를 걸었다. 양말로 스며든 빗물에 발걸음은 무거워졌다. 다리 위엔 파란 우산, 축축한 운동화 그리고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뿐이었다. 세상이 멈춘 것만 같았다. 가만히 서서, 한참 동안 텅 빈 다리 위를 바라봤다. 세상의 소리도, 걱정도, 고민도. 모두 빗소리가 덮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나 혼자였다. 누군가의 표정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이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상에 돌아오기까지 4년이 걸렸다.


여전히 작은 목소리지만, 아이스카페모카가 놓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이젠 이마가 아닌 눈을 바라보며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한참을 묻는다.


떠난 줄 알았던, 후리스가 돌아왔듯이

떠난 줄 알았던, 세상이 멈추길 바라던 마음도 돌아왔다.

아니 떠난 줄 알았을 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세상이 온통 빗소리만으로 가득한 날이 여전히 반갑다.

그때와 달라진 건.

비가 그친 내일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거다.


포근한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선,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본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평범한 일이 아닌 참 특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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