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워진 머리카락과 마음의 무게
꾹꾹.
'화이트머스크'라고 작게 적힌 샴푸통의 머리를 눌렀다. 하얀 수증기와 은은한 향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 머리카락 사이사이 거품을 묻히고 난 뒤, 따듯한 물로 씻어냈다. 샤워기 옆 선반 위에 놓여 있던 플라스틱 빗을 들었다. 엉켜있던 머리칼을 쓸어내리자 단정해진 머리칼이 얼굴을 감쌌다. 빗에는 머리카락이 서로 뒤엉켜있다. 손으로 빗을 어루만지자 안움큼 검은 수세미가 쥐어졌다.
샤워를 마칠 즈음이면 하수구 주변에 작은 바다가 생겼다. 더디게 내려가는 물을 바라볼 때마다 시선을 빠르게 돌렸다. '어차피 다시 날 테니까'하고 애써 무시하고 싶었다. 탈모는 오래전부터 익숙한 단어였지만 세 달 전부터 빠지는 양이 눈에 띄게 늘었다. 어느새 이마는 넓어졌고, 검던 정수리는 하얗게 변해갔다. 여름이 끝날 무렵이면, 남아있는 머리카락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이 마음을 메웠다.
하수구에 이불처럼 덮여 있던 머리카락 뭉치를 집어 들고 속으로 읊조렸다.
'삼 년간 길러온 머리카락인데. 이제 잘라야겠네.'
짧아진 길이만큼, 빠지는 양도 줄어들 거란 기대와
어쩌면 지금이, 머리카락이 남아 있을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순간, 머리카락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숱이 적으니 헤어롤도 몇 개 안 말겠지 싶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머리 위엔 열 개는 되어 보이는 헤어롤이 옹기종기 매달려 있었다. 파마를 말 것도 별로 없을 테니 금방 끝나겠지 싶었는데 두 시간을 훌쩍 넘겼다. 꾸벅꾸벅 조는 이 지루한 시간이 괜히 좋았다. 두 시간 동안 나는 그저 '평범한 여자'가 되었다. 얼굴을 살짝씩 가려주는 앞머리와 자연스러운 물결은 저장해 둔 사진 속에만 남겨졌다. 거울 속엔 추억의 깻잎 앞머리와 턱선보다 훨씬 올라간 뽀글한 파마머리였다. 그래도 좋았다. 어차피 새로움을 해보는 것이 목적이었고, 첫 방문 할인이라는 작은 위로도 받았으니까.
탈모는 단순히 머리카락이 빠지는 게 아니라는 걸.
몸이 약해지고 있다는 신호라는 걸. 나는 안다.
‘왜 나만 이럴까’
‘나도 저렇게 찰랑거리며 다닐 때가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다 빠지면 그땐 어떡하지' 같은 모든 말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오직 '사실'의 무게 만을 감당하기로 했다.
'사실'이라는 건, 생각보다 큰 무게를 가지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무게를 키우는 건, 어쩌면 우리가 붙이는 ‘생각’ 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자석처럼 빗에 머리카락이 엉겨 붙었지만, 체감상 절반쯤 줄어든 듯한 기분이다.
드라이기를 들고 서있는 시간은 절반이 줄었다.
시원해진 목 주변은 여름맞이 준비를 마친 듯했다.
뽀글 머리는 넓은 이마와 하얀 정수리를 교묘하게 숨겨주었다.
난생처음 해본 단발파마머리.
거울 속에는 어색한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미소 짓고 있는, 평범한 한 여자가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