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동거
아이가 태어나서 아장아장 걸을 무렵이었다.
딸아이를 돌봐 달라는 명목 하에 친정 부모님에게 “같이 살자!”고 했다. 별 뾰족한 수가 없음을 안 친정 부모님도 대답 대신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허름하고도 불편한 딸 네 집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5명이 9평 전셋집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사실 딸을 돌봐 달라고 요청한 것은 부모님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을 명목일 뿐이었다. 부모님 세대만 해도 출가한 딸과 같이 산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모님, 특히 엄마에게는 좀 모양새가 빠지는, 더욱이 가난한 딸 네 집에 얹혀살아야 한다는 것이 무지 불편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엄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큰아들 네와 4년 정도 살아본 경험이 있는 엄마로서는 딸 네랑 같이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합리화시켰을 수도 있다.
사실 나도 비껴갈 수만 있다면 비껴가고 싶었다. 그러나 억세다 못해 드센 친정 엄마와 함께 사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4남매 중 어느 누구도 그런 부모님과 함께 살겠다고 선뜻 손을 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오갈 때 없는 가난한 부모가 자식들 눈치 보며 이리저리 치여 다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비껴갈 수 없다면 정면으로 맞부딪혀 보자라는 심보로 같이 살자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나는 효녀가 아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어 안달이 난 효녀가 아니라 그보다는 내 부모가 이리저리 치어 다니는 꼴을 본다는 것, 그 자체가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 것 같다는 생각에 내린 결론이었다. 큰오빠 네랑 다시 사는 일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고부간의 갈등이 두 오빠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일었고, 복잡하게 얽힌 모든 관계들이 더 복잡하게 꼬여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지경에만 이를 것 같았다. 부모는 당연히 아들이 모셔야 한다는 옛적 풍습을 강요하기도 강요해서도 절대 안 될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남의 눈보다는 어떻게 하면 서로 꼬이지 않고 조용히 잘살 수 있을까에만 초집중을 했다.
서로들 눈치만 보고 있는 눈칫밥이 내 목을, 내 가슴을 서서히 조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불편한 나머지 먼저 내 입으로 “내가 모실게.”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일단 툭 뱉어놓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는 그 방법이 가장 최선이었다. 지나 놓고 보니 어찌 보면 내 일생에 가장 잘한 일이기도 하다.
시장 바닥에서 잔뼈가 굵을 대로 굵어진 엄마는 언제나 당당했다. 커다란 전대를 허리춤에 차고 외할머니, 아버지, 우리 4남매, 모두 6명을 부양하느라 목소리는 커질 대로 커졌고, 본인 뱃속으로 난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남보다 더 과장되게, 더 거칠게 살아왔던 엄마다. 4남매 중 3명을 대학에 보냈고, 두 명의 아들은 교수로 만들어 놓았으니 어깨에 힘을 주고 당당하게 때론 뻔뻔하게 요구하고 소리쳤다. 그런 거친 엄마의 모습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올케 언니들에게는 부담스러웠을 테고 감히 나서서 시부모님을 모시겠다는 이야기를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난한 남편을 만나 본인들의 삶도 버거운데 시부모님이랑 그것도 땡전 한 푼 없는 시부모님이랑 한 공간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선뜻 나서기가 힘든 일이다.
결국 자의든 타의든 ‘어쩌겠어… 내 부모인데…’라는 생각에 남편에게 물었고, 남편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 그래야지!”라고 대답해 주었다.
착한 남편은 “막내이면서 가난한 우리가 부모님을 모신다는 건 축복이야!”라고 하며 흔쾌히 이 사실을 받아들여 주었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사천리로 보따리 하나씩 들고 친정 부모님이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결혼할 무렵 친정아버지는 술을 완전히 끊은 상태였다. 폭행도 전혀 하지 않았다. 하긴 다른 때는 아주 얌전한 양처럼 있다가 술만 먹으면 이성을 잃고 폭행을 해댔으니 술을 끊자마자 그 행동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아마 아버지가 예전처럼 술고래에 폭행을 가했다면 남편은 부모님과 같이 사는 것에 대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내가 더 못했을 것이다. 혹여 내게 불똥이라도 떨어질 새라 꽁꽁 얼굴을 묻고 가능하면 나란 존재가 드러나지 않도록 무진장 애를 썼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다행히도 남편은 아버지가 술주정 부리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그냥 말 없고, 얌전하고, 착하디 착한 장인어른으로 보였을 것이다. 30대 초반에 일찍 부모님을 잃고 늘 그리움에 젖어 있던 남편에게 비록 처가 부모님이긴 하지만 부모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자신이 부모에게 못다 한 효도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우리 부부 2명, 딸아이 1명, 친정 부모님 2명,
모두 5명이 9평, 방 두 개짜리에서 함께 먹고 자게 되었다.
9평, 방 두 개에 화장실, 거실이라고 해야 하는지 부엌이라고 해야 하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의 공간에서 밥을 하고 밥을 먹었다. 방에서 몇 발자국만 떼면 마루에서 밥을 먹을 수 있고, 또 몇 발자국만 떼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뱅뱅 돌아봤자 몇 발자국도 안 되는 공간에서 5명이 복작거리며 불편하고도 불편한 동거를 하기 시작했다.
흔쾌히 허락한 남편도, 어쩔 수 없이 빈 몸으로 보따리 들고 온 친정 부모님도, ‘이 길이 최선이다!’라고 생각하고는 실천에 옮긴 나도, 모두 난감하고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주변에서는
“오빠들이 있고, 언니가 있는데 막내인 네가 왜 모셔야 해?”
“제일 가난한 너희 부부가 왜 모셔야 해?”라고 물었지만, 남의 속도 모르고 하는 소리라 귀담아듣지 않았다.
‘막내면 어쩔 거고, 가난하면 어쩔 거야? 속 편한 게 제일이지!’
이게 나의 대답이었다.
‘그래, 한 번 살아보는 거지 뭐!’
‘남도 아닌 내 부모인데!’
깡으로, 무식함으로 그렇게 9평, 한 공간에서 5명이 함께 살게 되었다.
* 표지 사진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