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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길 Oct 26. 2021

말은 힘이 세다.

토를 치우며

   

2교시 수업 도중, 리윤이가 갑작스럽게 토를 했다. 전날 예방접종 후유증일까.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예방접종을 두 종류 한꺼번에 맞았다고, 그것 때문에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셨다. 리윤이는 속이 울렁대는 와중에도 나에게 배가 아프다거나 토할 것 같다는 표현을 하지 못했다. 리윤이는 자주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특히 어른에게 그렇다.     


나는 유독 예민하고 말이 없는 아이였다. 초등 입학 적응기간, 유일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그 당시에도 학교에선 우유를 배급했다. 나는 그날 속이 울렁대고 좋지 않았지만 선생님께 우유를 못 마시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생각은 했지만 말을 못 했다'기 보단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몸 컨디션 고려 없이 꾸역꾸역 우유를 먹다가 다 토해내고 말았다. 내가 토하는 것을 보곤 옆 짝지도 덩달아 토했다. 그 상황이 내성적이고 예민한 8살 아이에게  얼마나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웠을까.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 조금이라도 인상을 쓰시거나 언성을 높이셨다면 나의 초등 적응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그날 나의 담임 선생님께서는 그 어떤 불편한 기색 없이 나와 친구의 토를 깨끗하게 정리해 주셨고 교과서와 필통도 새 것으로 바꿔 주셨다. 나에겐 그때 그 ‘선생님의 태도’가 한 장의 사진처럼 깊은 곳에 남아 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나온 토를 보고 놀라서 우는 리윤이가 애틋했다. 

놀란 리윤이를 달래고 엉망이 된 책상과 교과서를 수건으로 닦았다.      


“리윤아, 속이 많이 안 좋았구나. 언제부터 아팠니? 놀랐지? 괜찮아.”     


나는 리윤이 곁으로 몰려든 아이들에게 하고 있던 활동을 마저 하도록 안내한 뒤 뒷정리를 했다. 곧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쳤다. 우리반 아이들이 리윤이에게 다가와 따뜻한 마음을 전했다. 물론 냄새난다고 코를 막는 친구도 있었지만.

     

“괜찮아, 그럴 수 있어.” 

“괜찮아. 나도 아플 때 그랬어.”

“나도 입원했을 때 엄청 많이 토했어.”

“집에서 밥 먹다가 갑자기 토한 적 있어.”          




최근 반 아이들과 <누군가 뱉은>이라는 그림책을 함께 읽었다. 주인공 ‘꺼져’는 사람의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입으로 빠져나와 하나의 생명이 된다. '나쁜 말'들이 화가 난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상대의 얼굴이나 몸에 들러붙는다. '나쁜 말'들은 사람들의 당혹감, 슬픔, 속상함 등의 감정들에 즐거워한다. 하지만 ‘꺼져’는 그런 삶이 전혀 행복하지 않기에 주어진 삶을 살아가지 않고 다른 삶에 도전한다. 


이 그림책을 읽은 후 <누군가 뱉은 좋은 말> 활동을 했다. 우리 반 아이들 모두가 아이디어를 냈다.      


- 괜찮아. 감사합니다. 최고야! 고마워! 멋있어! 생일 축하해. 좋은 꿈 꿔. 참 예쁘다. 사랑해. 양보할게. 힘 내. 그럴 수 있어. 꿀 맛이야! 미안해. 할 수 있어! 너를 믿어. -  


그 후 아이들은 각 낱말들의 캐릭터를 상상해서 만들어 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개성 있는 생김새들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누군가 뱉은 예쁜 말> 활동에 나왔던 말을 기억해 내곤 리윤이의 마음을 위로해 준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말은 힘이 세다. 말을 뱉는 순간 그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 된다.

아이들도 그걸 안다. 

사랑의 말이 온 교실을 채웠던 시간. 

토를 치우는 내가 교사라서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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