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프라우를 다녀온 여운이 짙은 탓인지 새벽에 잠이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하고 사진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 8시 2분에 베른 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야 했던 탓에 다시 깊은 잠에 들 여유가 없었다. 기차 시간에 늦지 않도록 아침시간을 서둘렀다. 베른 역에서 취리히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츄리히에서 다시 뮌헨으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고 4시간을 가면 독일 땅에 다다른다. 기차에 올라 잠시 눈을 붙였는데 깊이 잠이 들었나 보다. 어느새 기차 안에 취리히에 도착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취리히에 내려 뮌헨으로 가는 유레일 기차로 갈아타고 간밤에 부족한 잠에 다시 빠졌다.
1시간 정도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기차는 도시를 벗어나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내달리고 있었다. 대평원에는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오직 여린 풀잎과 햇빛에 그늘진 구름들 그리고 바람이 풀잎 위를 노닐고 있었다.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고 내려앉아 여린 풀잎을 여기저기 쓸고 다녔고 바람이 지난 자리에 구름 그림자들이 대평원 위를 유유히 지나고 있었다. 하루도 쉼 없이 여행에 몰두하다 보니 잠시 쉬어 갈 여유가 부족했다. 따스한 햇볕이 차창 안으로 들어왔다. 햇볕은 무릎 위에 앉더니 어느새 가슴에 안기고 내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갔다.
서울이 다시 생각에 떠올랐다. 회사를 그만두고 닥친 막막함이 잠깐의 휴식을 파고들었다. 잠시 기차에서 내렸는데 기차를 놓치고 홀로 남은 느낌이 들었다. 다시 올 기차를 기다릴 것인지 늦더라도 걸어갈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잠시 잊어버리자’ 지금은 어쨌든 기차 안에 있다.
기차는 오후 1시가 다 되어 독일 뮌헨에 도착했다. 기차역에서 지하철을 이용해 미리 예약해 둔 숙소를 찾아갔다. 고등학교 시절 독일어를 배웠는데도 지하철의 역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센딩링거토르 역에서 내려 마리엔 광장으로 갔다. 그러다 보니 점심 식사 시간이 이미 지나버렸고 허기가 올라와 기운이 없었다. 마리엔 광장으로 가는 길에 착하게 생긴 독일 아가씨에게 맛집을 물었다. 파라솔 있는 곳까지 가서 왼쪽으로 돌면 ‘호프 스타트’라는 레스토랑을 소개해 주었다. 레스토랑은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서인지 손님이 없었다.
메뉴판을 보니 온통 파스타 종류로 가득했고 이곳은 파스타 전문점이었다. 아무거나 대충 골라 오렌지 주스와 함께 주문했다. 독일에 와서 맥주가 아니고 오렌지주스를 마신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내가 주문한 것은 라자냐였다. 내 허기진 배는 대실망이었다.
뮌헨의 중심지는 마리엔 광장이었다. 뮌헨의 랜드마크인 신 시청사 건물과 그 시계탑 주위로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 혼잡한 거리에 3명의 거리악사가 공연을 했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잠시라도 그들의 음악에 심취했다. 동전 몇 닢으로 보답하기에 미안할 정도로 그들의 음악은 훌륭했고 어디에 가고 싶지 않을 만큼 내 발목을 잡아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독일에 왔는데 맥주는 마셔야지’ 저녁 7시 ‘MAREDO’라는 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맥주를 주문하는데 ‘로우 알콜릭 비어 프리즈’라고 하니 독일 웨이트리스가 웃었다. 맥주를 주문하면서 도수가 약한 맥주를 시키니 비웃 고도 남았을 것이다. 술과 인연은 다음 생을 기약하기로 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산책 삼아 ‘영국정원’을 갔다. 드넓은 정원을 보니 왜 영국정원이라 했는지 짐작이 갔다. 유럽의 정원중 영국식 정원은 말을 타고 다니는 곳이지 걸어 다닐 곳이 아니다. 조금씩 무릎이 아파왔다. 유럽 여행은 무작정 걷는 게 일상이었다. 공원에서 쉬어가기에는 날이 너무 어두워졌다. 무릎이 아파오는 것을 견디며 뚜벅뚜벅 어둠이 내린 공원을 걸었다. 공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물은 비가 내린 직후라 급류로 변해 있었다. 이곳에서 독일 사람들은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의 건강하고 역동적인 에너지는 급류와 어우러져 춤을 추는 듯 유연하고 부드러웠다. 지하철역까지 어둠이 내린 뮌헨의 밤거리를 절뚝절뚝 걸었다. 마치 이 길이 순례길이고 걷고 있는 나는 온몸의 기운을 쇠진한 순례자가 된 것 같았다. 걷는 것이 불편했지만 마음은 알 수 없이 차분하고 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