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퍼톤스 - 공원여행
제주에서 혼밥이 일상이고 홀로가 익숙한 나에게 처음으로 룸메이트가 생겼다.
함덕의 숙소는 2인실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누군가와 매일 마주해야 했다. 생전 처음 보는 누군가와 함께 방을 써야하는 인생의 첫 경험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의 호기심과 설렘, 낯가림에서 오는 긴장감으로 뒤섞였다. 같이 밥을 먹자고 해볼까? 그동안의 여행이 어땠는지 물어볼까? 말은 걸수있을까? 만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쓸데없이 조급했다. 하지만 이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어젯밤에 처음 마주한 룸메이트는 밝은 인사와 함께 회 한 접시를 사왔으니 같이 먹지 않겠냐고 물었다.(먹을 거 주는 사람 = 좋은 사람) 정말. 정말정말정말 몹시 함께하고 싶었지만! 속이 좋지 않은 악몽 같은 날이었기에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고 했다.
24살. 깊은 바다의 머리색을 하고 있던 그녀는, 졸업 후 취업을 하기 전 여행을 왔다고 했다. MBTI 검사를 한다면 앞자리가 분명 'E'로 시작할 것 같은 그녀는 쾌활함 그 차체였다. 밝은 에너지가 넘쳤고 어제는 애월, 오늘은 함덕, 내일은 성산을 여행하는 의욕과 체력이 딱 그 나이 때의 예쁜 사람이었다. 같이 있으면 덩달아 기분 좋아지는 그런 능력의 소유자였다. 나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을 때가 있었던가. 24살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더라? 젊음과 청춘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때는, 그 때가 늦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때는 왜 항상 그때가 아니고 한참을 지나서야 깨닫는 걸까. 그때 이런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 나이에 맞게 현재를 만끽하며 살 수 있었을까? 그녀의 쾌활함이 그저 부러웠다. 그녀가 말했다.
" 와, 저 여기 와서 아무와도 대화 못할 줄 알았어요! 괜찮으시면 내일 점심 같이 드실래요?"
아무와 대화 못할 줄 알았던 고민은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하하하) 내일의 컨디션이 좋아지길 바라며 흔쾌히 함께 하자고 했다. 오랜만에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따뜻한 밤이었다.
그렇게 된 오늘의 컨디션은 다행이도 좋았다. 우리는 11시에 나와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의 추천 코스인 서우봉으로 향했다. 서우봉은 함덕해수욕장 바로 옆에 있는 기생화산으로 올레길 19코스와, 둘레길, 그리고 일출이 아름다운 명소이다. 날씨가 좋고 바람이 적당하면 패러글라이딩도 할수있다. 하지만 이곳이 진정한 명소인 이유는 따로있다. 날씨가 좋으면 제주에서 유.일.하.게. 한라산과 바다를 함께 볼 수 있는 아주 낭만적인곳 이라는 것 이다.(흐린날은 한라산이 보이지 않는다.) '유일하다'라는 말은 서우봉을 더 특별하게 만들고 기대하게 했다. 그리고 지금. 오늘이 그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 하늘이 파랗다 못해 쨍하고 맑고 화창했다. 함덕해수욕장에 처음 왔다는 그녀와 함께 해변과 공원을 걸어 서우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다섯 발자국 걷다 멈춰서 경치에 감탄하고, (와아-) 열 발자국 걷다가 멈춰 사진을 찍는(잠깐만! 여기! 여기 서보세요!) 여행길이었다. 시끌벅적하게 길을 걷는 것이 오랜만이라 즐거웠다.
가파른 오르막길에, 올라가는 것을 멈추고 입구에 있는 정자에 앉았다. 날씨요정이 도왔는지 (바람은 장난 없었지만) 맑고 상쾌한 날씨 덕분에 한라산과 함덕해변을 함께 보는 장관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변덕스러운 제주에서 '날씨가 좋다'는 것만큼 운 좋은 일이 있을까. 서귀포에서 매일 보던 한라산을 여기서 또 만나니 반갑고, 새로웠다. 내가 보지 못한 뒤쪽 세계에 존재하고 있던 한라산의 모습은 매일 쌩얼로 다니다가 본 화장한 친구의 낯선 모습, 장난꾸러기 친구가 본업에서 프로페셔널하게 일하는 모습 같았다.(한마디로 멋지다는 이야기.) 우리는 정자에 앉아 사진을 한 오백 장쯤 찍은 뒤,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함덕을 오면서 버스에서 스치듯 지나쳤던 가게 <존맛*식당>. 눈을 비비면서 내가 가게 이름을 잘 본 것이 맞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던 낙지요리 전문점이다. 이름에서부터 자부심이 남다른 이 식당에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혼자서는 먹을 수 없는, 두 명이 있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인 '제주 문어 철판'을 주문했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제일 서럽고 억울한 부분인 '먹고 싶은 음식이 2인 이상일 때'에 공감한 이유였다.
재밌었던 것은 우리가 '먹어 되나...?' '이 정도면 익은 건가?' '당면은 이때 넣으면 되나?'라고 눈치를 보면, 언제 오셨는지도 모를 사장님이 음식을 살피다가 '조금 있다가 드세요'라거나, '지금 드셔도 돼요'라고 쿨하게 지나가신다. 눈치 보고 있던 것을 들킨 것 같아 머쓱해서 웃음이 났다.
맛은? '존맛'이라는 이름을 써도 되는, 이름 값하는 식당으로 인정이다! 싱싱하고 양념이 잘 배인 문어 두 마리와 차돌박이의 조합은 말할 것도 없고, 문어는 질기지 않고 부드러웠다. 당면까지 추가하고 볶음밥까지 비벼 야무지게 먹었다고 하면 더 말이 필요 없지 않겠는가? 맥주 한잔이 간절하게 생각났지만, 그녀는 다음 일정을 위해, 나는 나의 위를 위해 간신히 참았다. 배도 부르고, 날씨도 좋고, 완벽히 행복한 순간이다.
*존맛: 존나맛있다의 줄임말. 음식이 매우 맛있음을 속되게 이르는 말.
배가 부르다고 후식을 안 먹을 순 없지. 함덕에 온다면 꼭 와보고 싶었던 빵집 <다니쉬>. 작년에 친구인 마늘과 왔을 때 못 가서 한이 남은 곳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곳이 그렇게 유명한 곳 인 줄도 몰랐다. 단순히 함덕에 이런 곳이 있는데 맛있더라~ 정도의 정보만 알고 있었을 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찾는 곳인 줄은 몰랐다.
코로나로 인해 1층의 카운터에는 한 팀씩만 입장할 수 있어서 밖에서 기다리다가 입장할 수 있었다. 오후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빵의 절반 이상은 사라지고 없었다.
스콘과 무화과가 박힌 휘낭시에,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뒤 2층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개인적으로 빵집에 가면 꼭 스콘을 먹어본다. 스콘이 맛있는 집이라면 다른 모든 빵도 다 맛있기 때문에 빵집의 필수 검문코스이다.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이유랄까.
우리는 카페에 앉아 서로의 여행 일대기와, 좋아하는 음악이나, 진로에 대한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만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한참을 수다를 떨다가 그녀는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해 길을 나서야 한다고 작별 인사를 했다. 연락할 수단 하나 공유하지 않은 채 헤어졌는데 오히려 그것이 추억이나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만들어 그녀가 이따금씩 생각날 것 같다. 그녀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어딜 가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한방을 함께 쓰고, 함께 밥을 먹고, 같은 것을 보고 경험을 나누는 일.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일. 여행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녀를 먼저 보내고 책을 좀 더 읽다가 카페를 나오는데 해가 저물고 있었다. 숨쉬는 것을 잊을만큼 집중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다가 이 장관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서우봉까지 달렸다. 저 노을이 사라지기 전에 사진을 찍어야 한다!라는 마음 하나로 숨차게 달렸다. 서우봉을 올라가는 오르막길이 고비 었지만, 다행히 사라지기 전에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뛴 보람이 있었다. 이런 풍경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니까! 이제 다시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은 또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전처럼 두렵지 않다.
오늘의 우당탕탕 제주도
함덕해수욕장-> 서우봉-> 오드랑베이커리-> 존맛식당-> 다니쉬-> 서우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