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취미수집가 Jun 03. 2021

[제주도 한달살기] 우당탕탕 제주도 함덕18일 차

♫ 이세계 -  낭만젊음사랑

정말 일어나기 싫은 아침이었다. 며칠 사이 갑자기 추워진 날씨와, 체한 이후 몸의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은 탓에, 몸이 바닥에 깊숙이 박힌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잠들었다 깨었다를 반복하다가 나가기로 약속된 시간이 되어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침대의 위층을 쓰고 있는 A도 아까부터 일어났는지 뒤척거리고 있었다. 


6인 이상의 도미토리가 아닌  2인용 도미토리는, 둘만 있기 때문에 어쩐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불편한 것이 느껴지면 신경이 쓰이고,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할 것 같고,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은 어색한 분위기 말이다. 그 적막하고 숨 막히는 기류를 참지 못하고 말을 건네는 쪽은 나였다.(도대체 왜?) 그렇다. 나는, 인싸*도 아싸*도 아닌 어정쩡하고 어중간한 그럴싸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병이다 병.


* 인싸: 인사이더(insider)의 줄임말로, 아웃사이더와는 다르게 무리에 잘 섞여 노는 사람들을 말한다.

* 아싸: 아웃사이더(outsider)를 줄인 말로 여러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

* 그럴싸: 인싸(insider: 무리에 잘 섞여 노는 사람)도 아니고 아싸(outsider: 무리에 잘 섞이지 못하는 사람)

  도 아닌 인싸와 아싸 중간에 '그럴싸' 하게 속해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



어제 처음 만난 A는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와 맑고 차분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의료계에서 일을 하는데, 오랜만에 받은 휴가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제주에 왔다고 하였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고단함의 이유 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주신 맛집 리스트를 보다가 말을 건넸다.


" 혹시... 괜찮으면 점심 같이 드실래요?"

" 헉, 그래도 되나요? 저 이곳에 와서 아무와도 대화 못할 줄 알았는데... 좋아요! "


'어제도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이것은 데자뷔인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질감 같은 것일까, 여행의 로망인가, 셋 다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것은 함께 점심먹을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는 숙소를 나와 근처의 돈가스집에서 점심을 먹고, 서우봉으로 향했다. 먹는동안 여행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누구든 '제주에서 바다를 앞에 두고 한라산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황홀한 말을 들었다면, 가지 않고는 못 견딜 테니, 어쩌면 당연한 식후 일정이었다.(하하하) 


익숙한 길이 아닌 낯선 길로 안내하는 지도를 따라 걸으니 의도하지 않은 동네 여행이 시작되었다. 가보고 싶었던 동네서점을 우연히 발견하여 구경하기도 하고, 로또 명당 편의점을 지나칠 수 없어 오천 원짜리 로또를 한 장씩 사고 나서 히히거렸다. 같은 장소를 다른 길로 걷고, 함께하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기분과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이 낯설고 별거 아닌 일 덕분에 매일이 새롭다. 


서우봉에서 본 구름 카펫이 깔린 하늘, 흐릿하게 보이는 한라산

그렇게 올라간 서우봉은 구름이 잔뜩 낀 덕분에 한라산의 꼭대기와 형체만 겨우 보였다. 어제처럼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못 보는 날이 많으니 보이는 것에 만족했다. 점점 맑아지는 날씨를 핑계삼아 포트폴리오 작업을 하려고 가져온 노트북을 가방에 쑤셔 넣고, A를 따라 비자림을 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뚜벅이였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버스를 타자마자 또다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희망적인 사실은 멀지 않은 곳에 환승정류장이 있다는것. 때문에 조금만 참으면 된다는 것이다. 다만, 비자림을 가는 환승버스를 놓쳐버려 1시간을 기다려야 하는것이 말썽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우리는 두명이니까! 잠깐 '걸어갈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시간을 아끼기 위해 택시를 타기로 했다.(이 순간만큼은 렌터카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나중에 택시를 타고 가면서 알았다.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길과 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걷지 않고 택시를 탄 일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표를 끊고 입장한 비자림은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 같았다. 오랜 시간이 녹아든 거대한 고목들 사이를 걸으니 신비로움과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말없이 천천히 숲길을 걸었다. 변덕맞은 하늘은 우산을 가져온 것이 무색하게 개어 있었고, 잠깐 내린 비 덕분에 촉촉해진 땅의 흙내음과, 짙은 숲의 향이 마스크를 뚫고 들어와 맑고 상쾌한 기운이 충만했다. 황토색 송이길, 비자나무의 향, 이끼 낀 나무들과 새소리, 바람, 나뭇잎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숲을 더 운치 있게 만들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바다가 마음을 다독여준다면, 숲은 마음을 말랑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오늘 제일 잘한 일을 꼽으라 하면 A를 따라 비자림에 따라온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오길 참 잘했다. 비자림 근처의 다랑쉬오름이나 안돌 오름의 비밀의 숲도 가보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은 시간에 오솔길만 걷고 A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다시 혼자가 되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 몸보신으로 해물뚝배기를 든든하게 먹고 들어와 이 일기를 쓴다.


바바 호미 게스트하우스의 다락방에서


우린 낭만이란 배를 타고 떠나갈 거야

우린 젊음이란 배를 타고 떠나갈 거야 

우린 사랑이란 배를 타고 떠나갈 거야

아무것도 모르지만 우린 괜찮을 거야  

<이세계 -  낭만젊음사랑>


가보지 않은 새로운 시도는 늘 불안과 걱정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 형체 없는 불안을 직접 마주하게 되면 정말 '쓸모없는 걱정'이라는 것을 몇 차례의 경험을 통해 느낀다. (물론 그런 결과를 만난 것은 정말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흐린 날씨에 고민하고, 귀찮음에 고민하고, 낯섦에 머뭇거렸던 시간들이 아까웠다. 좋았으면 추억이고, 나빴으면 경험이라고 했던가. 귀찮음을 이기고, 망설임을 넘어, 한발 더 용기를 낸다면, 그 발걸음은 나를 잊지못할 경험과, 낭만이 있는 멋진 추억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든다.




오늘의 우당탕탕 제주도

도나망-> 만춘서점-> 함덕해수욕장, 서우봉-> 비자림-> 기쁨이네 해물탕&돌솥밥  


이전 01화 [제주도한달살기] 우당탕탕 제주도 함덕 17일 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