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학개론
터치로부터 사랑은 시작된다. love is touch. 사랑한다면서 만짐이 없다면 사랑이 아니고, 만짐 없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다. 사랑은 곧 만짐이다.
인간의 오감은 각각의 특징이 있다. 외부로부터 정보를 입력하는 방법이 각기 다른 감각기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이르는 오감. 이 중에서 촉각은 다른 감각과는 달리 '느낀다'는 것이다. 시각은 보고 청각은 듣고, 미각은 맛보고, 후각은 맡는다고 하지만 촉각은 '느낀다'라고 하는 특징이 있다. 느낀다는 것은 인간의 감성적인 측면이다. 오감을 모두 동원하여 느낀다면 더 입체적이 되겠지만, 오감을 각기 따로 볼 때 촉각만큼의 대단한 느낌의 위력을 가진 것도 없는 듯하다.
촉각 즉 터치는 아무 소리 없이 눈을 감고 있어도 상대를 알고 느낄 수 있는, 의사 전달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닌가 싶다. 이산가족 상봉 후의 헤어질 때의 모습, 영화 속 기차역에서 이별이나 교도소에서 면회, 한결같이 열리지도 않고 직접 닿을 수도 없는 유리창에 손을 서로 맞대어 정을 느끼려고 한다. 시각으로도, 청각으로도 느낄 수 없는 그 느낌의 감각이 오직 만짐에만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로 그다음엔 눈으로 주고받던 언어들이 만짐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어사전에 있는 스킨십(skinship)은 skin+ship의 합성어라는 말과, 육아 용어인 kinship(혈족 관계)에서 유래했다는 말이 있다. 조금 의아한 것은 이 스킨십은 진짜 영어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스킨십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와 일본 등 일부에서만 통용되는 말인데, 피부 접촉 또는 애무로 번역할 수 있겠다. 그냥 피부 접촉이라 하니 무미건조하고, 애무라고 하니 베드신이 연상되니 그냥 '만짐'으로 했으면 좋겠다.
사랑은 만짐이니 이 스킨십의 진도에 따라 사랑의 깊이 혹은 친밀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사랑을 시작하면 우연을 가장한 고의적인 만짐을 시도한다. 괜히 어깨의 먼지도 털어주고 머리칼을 떼어내는 등의 초보적인 만짐을 시도한다. 그러다 조용히 손을 잡고, 손을 뿌리치지 않으면 '당신의 마음을 수용한다'는 무언의 대화가 되는 것이며, 잡은 손 안에서 미세한 행동을 하기도 하며 의사를 전달한다. 물론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터치의 시작이 손의 만짐이 아닐 수도 있고 적극성 또한 천차만별이겠지만....
만짐의 면적, 즉 접촉하는 면적의 크고 작음이 두 사람의 사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작은 만짐은 초보 사랑이고, 넓은 만짐은 익은 사랑이다. 이것이 만짐의 진도이다. 작은 만짐에서 넓은 만짐으로 변해가고 만짐의 장소도 변해간다. 만짐은 마치 수학처럼 기초가 없이는 그다음 단계로 나가지 못한다. 물론 사랑이라고 하는 기초 위에서 한 스텝 한 스텝 전진해 나간다. 그러다 가끔은 이 만짐의 속도 조절 때문에 다투기도 하고 고민거리가 되기도 한다.
만짐은 사랑의 초기 단계임은 분명하지만 초기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만짐은 곧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