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을 사랑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사랑을 하면 모든 것이 긍정적이며 온 세상이 무지갯빛으로 보인다.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들어오니 모든 것이 황홀하게 다가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리라. 하지만 이런 황홀 지경의 새로운 세계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항상 새롭지만은 않고, 계속 긍정적일 수만은 없다. 이것이 오래된 연인들의 헤어지는 이유이기도 한데, 신기한 것은 사랑하게 된 이유와 헤어지는 이유가 같다는 것이다.
상대의 과묵함에 매력을 느껴 사랑에 빠졌다면, 헤어질 땐 말이 없어 답답하다는 단어로 바뀌게 되고, 세심한 배려에 마음이 빼앗겼다면 헤어질 땐 그것이 매사에 간섭이고 사람이 너무 쪼잔하다고 말을 하게 된다. 팔방미인이라는 칭찬도 모든 것을 어설프게 알 뿐 어디 하나 명확히 하는 것이 없다고 바뀌어 버린다. 연륜은 늙음으로, 청춘은 애송이로, 미모는 꼴값으로, 꽃미남은 기생오라비로 변하게 된다. 꼭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마음으로 상황을 보느냐에 따라 사랑의 이유도 되고 이별의 이유도 된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호감으로, 익숙한 세계에서는 비호감으로 바뀌어 버리는, 사랑하는 이유와 이별하는 이유가 같은 사람의 간사함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에로스 사랑의 내면에는 집착, 소유욕, 질투가 있다. 애정 결핍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것들의 정도가 강하며 또한 상대가 나에게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사랑의 대상에 대하여 끊임없는 애정을 보내고 그리워하는 모습, 그것을 긍정적으로 보면 너무나 사랑하고 있기에 나오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정도가 심하면 문제 행동이다. 집착, 소유욕, 질투가 전혀 없어도 애정 전선에 이상이 오지만 너무 많으면 다른 큰일로 바뀔 수도 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오래 잘 유지하려면 ‘적당’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상대에게 보낸 메시지에 즉답이 없다고 짜증을 낼 정도면 집착에 가깝다. 실시간으로 휴대전화를 쳐다보고 답을 할 상황이 아닐 때가 더 많다. 상대가 나 외에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해 불쾌한 감정이 있다면, 이 역시 집착이다. 상대도 나 외 다른 사람과 교류를 할 수 있고, 사회생활에서 당연히 그렇게 하여야 한다. 나도 그 사람 외에 이성이든 동성이든 교류하고 있으면서, 상대는 나만 교류해야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상대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것도 집착이다. 누구에게나 사적인 영역이 존재한다.
사랑하다 먼저 저세상으로 간 사람을 따라가는 사람, 영화에서는 이것을 미화하여 표현할 수도 있으나 사실 이것은 굉장한 집착이다. 이 땅에 없는 사람을 잊지 못해 오매불망 그리워하며 새로운 사랑이 찾아와도 외면하는 것 역시 과거에 대한 집착이다. 되돌릴 수 없는 경우에는 지나간 그 사랑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새로운 생을 찾아가는 것이 정상이다.
상대의 전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소유욕은 과욕이다. 사랑한다고 상대를 모두 다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반면에 나의 영역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소유할 수도 없는 것을 두고 마음 아파한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는다. 포기해야 할 것을 붙잡고 있으면 나만 아프고 불편할 뿐이다. 상대가 나만을 소유해 주기를 바라는 것과 달리 나 외의 다른 인물에게 관심을 보낼 때 질투의 감정이 생긴다. 질투의 내면에는 상대에 의한 소유욕, 집착을 당하고 싶은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질투는 소유욕에 기인하고 지나친 소유욕은 집착을 낳으며 결국엔 상대를 사랑이란 이름으로 구속하게 된다.
사랑은 서로 달콤한 말만 속삭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랑하는 사이엔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 미묘한 감정들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 사랑을 이루려면 이러한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는 지혜가 필요하고, 거기에 집착, 소유욕, 질투도 적절히 가미하는 사랑의 기술도 필요하다. 사랑의 이유와 이별의 이유가 같은 모순된 생각을 하는 인간끼리의 사랑인데, 어디 쉽게 얻어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