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기억들
물안개가 뿌옇게 내려앉은 저수지는 비밀을 가득 끌어안고 있는 것 마냥 신비로웠다. 고개를 들고 가슴을 벌려 후우~하고 깊은숨을 들이마시면, 그 호흡을 따라 달콤한 산소가 폐 속으로 가득 찰 것 같은 설렘이 생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불편했던 한낮의 뜨거움은 어느새 물러가고 이제 서서히 초가을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9월의 끝, 저수지로 들어서는 도로가를 굳굳하게 지키고 서있는 가로수의 짙은 잎사귀들이 붉게 물들 날도 머지않았다.
이십 년 전쯤 나는 아침마다 그 저수지길로 출근을 했다.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 저수지길로 들어서면 바로 좁은 흙길이 시작되었고, 아침마다 어김없이 그곳은 늘 신비로운 물안개가 내려앉곤 했다. 가끔 비가 내려 그 길이 질척거리거나 군데군데 물고랑 같은 것이 생겨 불편함도 있긴 했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난 편하고 넓은 도로보다 그 길이 좋았다. 아침마다 마주하는 물안개와, 잔잔한 저수지, 약간은 습한 공기가 전해주는 냄새들과 밤새 잘 잤냐는 인사를 건네며 나는 아침마다 설레었고 행복했었을 것이다. 저수지를 다 돌고 나오는 모퉁이에는 아주 크고 듬직한 나무한 그루 서있었고, 거기서부터 다시 정겨운 시골 마을과도 같은 풍경이 시작된다.
저수지의 밤은 더욱 정겨웠다. 군데군데 낚싯대가 드리워졌고 요동도 없이 잔잔한 물 위에 초록색 야광 캐미가 동동 떠있다. 멀리서 보면 그것들은 물 위에 떠있는 반딧불과도 같이 아름다웠다.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보았던 반딧불, 요정처럼 신비스럽게 반짝인다던 그 반딧불처럼 그렇게 빛나고 있었다. 한참을 돌계단에 앉아 밤이 내려앉은 저수지를 바라보며 있었다. 긴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지금 나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모든 것이 좋았던 순간이었다. 밤도, 저수지도, 하늘도, 자판기 커피 향도.. 밤하늘의 반딧불처럼 그저 설레었고 빛났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그땐 알지 못했다. 그 기억들부터 생겨난 잔잔한 감정의 조각들이 오랫동안 가슴을 시리게 하게 그리움으로 남게 되리란 것을 말이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 저수지의 흙길에는 아주 길고 멋진 레일이 깔렸고 레일바이크라는 커다란 자전거가 그 레일 위로 달리고 있다. 저수지 주변의 몇 개의 작은 연못에는 예쁜 연꽃이 저마다 갖가지 모양과 색을 뽐내고 있고, 걸어서 저수지를 돌아볼 수 있도록 멋진 데크도 깔려있다. 언제부턴가 수질보호를 위해 낚시는 금지되었고, 그 정겨웠던 마을은 신도시로 탈바꿈되어 이제 그 옛날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그 커다랗고 든든한 풍채로 마을 어귀를 지키던 나무만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서있으니 추억하는 나에게는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나는 여전히 수시로 그 저수지를 찾고 있다. 겨울을 지나 해빙기가 시작되는 봄이면 차가움을 끌어안고 걸어보기도 하고, 신록이 우거져 푸르른 여름날엔 커다란 모자 속에 얼굴을 묻고도 찾아간다. 지금처럼 가을의 길목에 서면 저리도록 그리운 그 기억들이 떠올라 잠시 행복함에 빠져들어 보기도 하며 말이다. 한때는 눈물 나게 그리웠었고 아프기도 했지만 이제 지나간 모든 것은 소중한 추억들이고 나의 삶이니 그마저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때는 아프던 것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아팠던 것은 다 사라지고 행복했었다는 착각마저 들게 하니 그래서 지나간 모든 것은 행복한 추억이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기억력이 약해지는 것은 조물주가 우리에게 준 선물인 것이다. 베란다에 걸려있는 노란색 티셔츠 위에 햇살이 걸쳐 개나리처럼 예쁘게 빛이 난다. 이른 점심을 챙겨 먹고 저수지를 찾아봐야겠다. 오늘은 천천히 걸으며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는 행복한 기억을 마주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