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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꼬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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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Apr 16. 2019

백년해로

2019년 4월 12일 저녁과 다음날의 아침.


꼬리와 사는 집에 언니를 초대했다. 어색하고 따뜻한 저녁을 함께 먹고, 언니는 돌아갔다. 언니가 떠난 후, 꼬리는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못 물었다고 했다. 현재 애인과 4년이나 만났다던데, 어떡하면 오래 사랑할 수 있냐고 묻고 싶었다고 했다. 칩코와 오래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같은 고민이 담긴 고정희 시인의 시 한 구절을 보여주면서. 나는 내가 늘 하던 고민이 꼬리의 입에서 나와서 놀라버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내가 그제 퇴근길에서 했던 아주 유치한 상상까지 불어버렸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문득 꼬리가 죽는 상상을 했다. 갑자기 너무 허무해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만석 버스는 묵직하게 흔들리며 나를 달랬다. 이 터무니없던 상상을 털어놓을 때도 눈물이 났는데, 좀 창피해서 웃음도 났다. 꼬리는 또 나를 따라서 울고 웃었다. 다음날 아침, 같은 방향을 보고 옆으로 누워 있던 중, 꼬리가 선우정아의 <백년해로>라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내 허리를 안은 꼬리의 팔을 만지작대며 노래를 듣는데, 뒤에 있는 꼬리가 숨죽이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꼬리는 붉어진 눈가를 급하게 이불에 숨기며 웃었다. 순간 숨 막히게 목울대가 울컥, 두 귀가 꽉 먹먹해지고, 이마와 눈이 뜨거워졌다. 몸을 돌려 꼬리를 끌어안았다. '지겹게 있어줘. 제발 먼저 떠나지 말아줘'. 가사가 끝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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