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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 Project Oct 02. 2019

단풍을 읊고 국화에 취하다, 가을 명절 중양절(重陽節)

음력 9월 9일, 1년 중 가장 길(吉)한 날을 즐기는 선조들의 방법


단풍놀이를 위한 명절이 있다고?


혹서기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19년 첫 단풍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기상청에 따르면 9월 27일 설악산을 시작으로, 10월 1일 오대산, 10월 11일 지리산, 10월 15일 한라산까지 단풍 물이 든다고 합니다.

산세가 깊은 한반도인 만큼, 가을엔 단풍놀이를 가는 것이 관습이죠.

실제로 단풍이 들 무렵, 등산을 하며 즐겨 놀았던 명절이 있습니다.


올해 10월 7일인 음력 9월 9일, 단풍이 빼어난 산을 오르며 국화주를 마시고 즐기는 중양절(重陽節)입니다.



9월 9일, 1년 중 가장 길(吉)한 날


중양절은 산으로 나들이를 가 가을을 즐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명절입니다.

중국에서 유래해 아주 깊은 역사를 갖고 있는데요, 이 가을 명절이 탄생한 데에는 동양철학적 배경과 설화적 배경이 있습니다.


우선, 9월 9일은 같은 양의 숫자가 겹치는 길(吉)한 날이기에 명절로 삼기 적합합니다. 중화권을 지배하는 음양 사상에서 짝수는 음의 숫자, 홀수는 양의 숫자로, 양기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의 숫자가 겹치는 날을 중일(重日)이라 해 명절로 삼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삼짇날, 단오, 칠석이 바로 모두 중일입니다. 다만,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과 9월 9일 모두 양(陽)이 두 번 겹치지만, 그중 특히 9월 9일의 9는 장수를 뜻하는 久와 중국어 발음이 같기도 하고, 숫자 중 가장 큰 수이기 때문에 날짜만을 특히 중양절(重陽節 - "양기가 가득한 날")이라 일컫게 된 것입니다. 지역에 따라 중양절은 중구(重九)라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중양절은 1년 중 가장 길한 날, 동시에 장수를 뜻하는 날로 예부터 중국 문화에 자리 잡았습니다. 당, 송 시대엔 중양절을 추석보다 더욱 성대하게 기념했다고 하며, 현재 중국에선 9월 9일을 노인의 날로 지정해 그 맥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중국의 중양절, 현 노인의 날. 출처 : http://gwh.cnnrtv.com/2016/1009/13735.html


9월 9일은 추수가 마무리되고 단풍이 필 무렵이기도 합니다. 중국과 한국 모두 중양절엔 산을 오르며(등고, 登高) 경치를 감상하는 풍속이 있습니다. 이는 동한(東漢) 시절,  항경(恒景)이라는 사람이 어느 도인의 예언에 따라 9월 9일, 가족과 함께 산에 올라갔더니 마을에 내려온 피해를 피할 수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항경은 도인의 말에 따라 주머니에는 수유 열매를 넣고 국화주를 마셨기 때문에, 중양절에 등고를 할 땐 수유 열매와 국화주를 챙겨 산을 오릅니다.


가을에 빨갛게 익는 산수유 열매와 가을의 꽃 국화.



조상님들이 중양절을 즐긴 방법


이렇게 중양절은 동양 사회의 사상과 지역 자연에 기반한 유서 깊은 옛 명절이며, 이는 한반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중국과 교류과 활발했던 신라엔 중양절에 군신들의 연례 모임이 행해졌으며, 특히 고려시대에는 국가적 향연을 벌어졌다는 것이 기록에서 빈번히 등장합니다. 조선시대에도 중양절은 국가, 민간에서 활발하게 기념이 되었는데, 특히 조선 세종 때에는 중양절을 명절로 공인하여 과거 시험을 열고, 늙은 대신들을 위한 잔치인 기로연(耆老宴)을 베풀었습니다. 


중양절(重陽節)이므로 탁주(濁酒)와 풍악을 기로(耆老)와 재추(宰樞)에게 내리고 보제원(普濟院)에 모여서 연회 하게 하였다.

壬子/以重陽濁酒樂于耆老宰樞, 令會宴于普濟院

 - 세종실록 45권, 세종 11년 9월 9일 임자 1번째 기사

*보제원: 1393년~1895년 여행자의 무료 숙박과 병자에 약을 주던 곳. 현재 그 터가 6호선 안암역 근처에 남아 있다.
기로(耆老) 검찬성(檢贊成) 안지(安止) 등이 보제원(普濟院)에서 잔치를 베푸니, 도승지(都承旨) 박원형(朴元亨)에게 명하여 가서 술과 풍악을 주게 하였다… (생략)... 이날에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관각(館閣) 당상관(堂上官)이 성균관(成均館)에 모여 제생(諸生)을 시험하니, 우승지(右承旨) 조석문(曹錫文)에게 명하여 가서 술과 고기를 주게 하였다.

丙子/耆老(楢)〔檢〕 贊成安止等, 設宴于普濟院, 命都承旨朴元亨, 往賜酒樂。 …(생략)... 是日議政府、六曹、館閣堂上, 會于成均館, 課試諸生, 命右承旨曺錫文, 往賜酒肉

 - 세조실록 5권, 세조 2년 9월 9일 병자 1번째 기사
기로연을 그린 靈壽閣耆老宴圖 병풍의 일부


또한, 일 년 중 몇 안 되는 왕이 직접 참여하는 제사가 중양절에 행해졌으며, 제사, 성묘, 모임 등을 위해 관리들에겐 하루 휴가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중양절을 가장 정석적으로, 그리고 대중적으로 즐겼던 방법은 산을 올라 국화주를 곁들여 경치를 즐기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양절엔 수유 열매와 국화주를 챙겨 등고(登高)를 하는 것이 풍습입니다. 양반들은 이 날 소소히 등고회를 열어 눈으로는 단풍에, 입으로는 국화전과 국화주에 진득이 취해 시를 읊으며 놀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중양절을 기다리며 재밌게 놀았는지, 옛 조상님들의 9월 9일에 대한 풍류와 흥은 현존하는 많은 기록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구일에 제운루에서 멀리 바라보니, 동산 꼭대기에 사람들이 올라가서 술을 마시는데, 저물녘에 이르니 혹은 앉았고 혹은 서 있고 혹은 부축하여 산을 내려오기도 하고 혹은 서로 베고 누워있기도 하여, 바라보기에 마치 그림 같구나.

重九 齊雲樓 遙見 東山頂 野人登臨 飮酒 至薄暮 或坐或立 或扶携下山 或偃臥枕籍 望之如畫.

 - 김종직(金宗直, 조선 전기 문인, 1431 ~ 1492)이 허학장(許學長)에게 답하는 시 중
우거에 찾아오는 거마도 드물어서 / 寓居車馬稀
복건 차림으로 마당 주위 돌아다니며 / 幅巾行庭曲
황금색 국화꽃을 따고 또 따도 / 采采黃金花
아침 내내 한 줌도 채우지 못했는데 / 終朝不盈掬
귀한 손님이 술 들고 찾아왔으니 / 伊人携酒來
기쁜 빛이 얼굴에 가득할 수밖에 / 喜色浮面目
한 잔 또 한 잔 마시는 그 사이에 / 一盃還一盃
쏴아 하고 불어오는 가을바람 소리 / 西風吹淅瀝
나그네는 원래 다감하게 마련인데 / 客子自多感
더구나 멋진 자리 회포를 푸는데야 / 況此展良覿
곤드레만드레 취한들 또 어찌 사양하리 / 酩酊不復辭
천지에 홀로 서서 호연히 노래 부르노라 / 浩歌立於獨

중구일에 박연 안일이 술을 들고 찾아왔기에 그 술을 마시고서 몹시 취하여 붓을 달리다
重九日朴珚安逸携酒見訪飲之至醉走筆

 - 고려 말 학자 이숭인(李崇仁)의 시문집 중


재액을 피하고 장수를 기리는 의미에서 시작한 중양절이지만, 어디서나 아름답게 단풍을 구경할 수 있는 한반도에선 중양절의 놀이 문화인 등고가 더 활발하게 발달했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중양절을 즐기는 방법


그렇다면 오늘날에 중양절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기념할 수 있을까요?

음양 사상과 멀어진 현대 사회에서 길일로서 9월 9일의 의미는 현저히 약해졌습니다. 하지만 중양절의 풍속과 오늘날의 가을 나기를 비교해 봤을 때, “단풍놀이”라는 이름으로 전 국민이 산을 찾는 관습은 과거 조선의 양반들이 중양절에 맞춰 등고회를 즐긴 것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양절에 등고하기 좋은 산에 대해선 아래의 기록이 있습니다.


서울 풍속에 남산과 북산에 올라 먹고 마시며 즐기는데 이는 등고의 옛 풍속을 따른 것이다. 청풍계, 후조당, 남한산,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이 단풍 구경에 좋다.

都俗 登南北山 飮食以爲樂 盖襲登高之古俗也 靑楓溪 後凋堂 南北漢 道峯 水落山 有賞楓之勝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이 외에도 9월 무렵 “북봉(北峰)을 방문한 언급이 조선왕조실록과 민간지에서 잦은데, 이는 궁궐의 위치와 서울의 지리 미루어 보아 북악산 일대로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주로 중양절을 즐기는 대상은 하루 휴가를 받은 대신들이었기 때문에 거주지와 가깝고, 등반하기 쉬운 북악산을 많이 선택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도 아름다운 북악산의 단풍.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koreatrails
현재 북악산은 "북악 스카이웨이"로 단풍 명소가 되었다.


등고와 더불어 중양절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국화주와 국화전입니다.

동양 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화는 그 빼어난 향과 절개로 시의 주제, 감상의 주제, 그림의 주제는 물론, 결국 술과 음식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가을에 국화로 술과 전을 만들어 먹을 땐, 들에 피는 감국(甘菊)을 사용합니다.


국화주는 중양절은 물론 가을의 대표적인 세시주로서, 감국을 담가 만들거나, 간단히 약주에 국화꽃을 띄워 즐겼다고 합니다. 국화주는 술 한 말에 꽃 두 되 꼴로 주머니에 넣어 술독에 담근다 전해지는데, 이는 현대 기준으로 술 약 18L에 꽃 3.6L를 넣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 정도 꽃을 술에 담그면 그 향이 베어 은은한 꽃 향을 머금은 가향(加香)주가 됩니다.


국화전은 진달래전과 마찬가지로, 찹쌀 반죽에 국화를 넣어 기름에 지져 먹습니다. 긋한 국화 향이 살짝 입혀진 고소한 국화전을 꿀이나 조청에 찍어 먹으며 서울의 가을 풍경을 내려다보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잠깐 쉬어가는 날, 가을의 휴일


올해는 양력 10월 7일 월요일이 음력 9월 9일, 중양절입니다.

여러분은 가을을 어떻게 보내시나요? 옷을 여미며 날이 추워졌다는 것을 체감하지만, 일상에 치여 가을을 맞이하고 즐기는 행사는 과거에 비해 더욱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과거 조상들의 풍류를 벗 삼아, 이번 주말 산으로 나들이를 떠나보시는 것은 어떠세요? 한반도 양반들의 놀이문화로 자리 잡았던 중양절 외출은 지금도 쉽게 즐길 수 있습니다.

소문난 문장가들이 아름다운 시를 짓기 위해 모인 가을 명소 북악산에 올라 단풍의 운치를 느껴보시고, 길 곳곳에 피어난 국화를 찾아 이 꽃을 사랑했던 많은 주객들을 떠올려보세요.


가을이 선물하는 1년 중 가장 기운 좋은 날, 맑은 하늘 아래서 마음껏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중양절.

올해 함께 즐겨보시면 어떨까요?




자료 출처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중양절(重陽節)"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4909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등고(登高)"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3680

네이버 지식백과 "국화주" http://bitly.kr/HUiKulO

상하이방, "음력 9월 9일 중양절의 유래와 풍습" http://bitly.kr/V9l9L7Y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dallsull/221391513112

https://blog.naver.com/a630203/120172706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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