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리우
브라질 '리우'는 거대한 한증막 같았다. 5분만 걸어도 땀으로 아이스버킷을 한 것처럼 옷이 다 젖었고 해변 모래는 계란을 찔 정도로 뜨거웠으며 숨을 쉬면 혀가 바닥에 닿을 것처럼 헥헥거렸다. 한국에서 몇십 년간 뜨거운 여름을 겪였고 상해에도 1년 살아봤고 동남아도 자주 가지만 살다 살다 이런 더위는 처음이다. 해변에서 멋진 일몰을 보며 맥주로 피로를 풀고 호스텔로 돌아왔는데 원숭이처럼 온몸에 털이 난(심지어 등에도!) 유럽인이 아내 침대 위에서 뻔뻔스럽게 자고 있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팔을 흔들며 말을 걸자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때 아내의 우렁찬 한마디 야! 유럽인은 토끼 눈을 하고 벌떡 일어나더니 허겁지겁 종이쪽지를 보여줬다. 쪽지에는 아내와 같은 도미토리 번호가 적혀있었다. 중복 예약이었다. 호스텔 직원은 삼바 축제기간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런 일이 빈번하니 양해해달라고 하면서 기계처럼 웃었다.
다음날 저녁 늦게 삼바 축제가 열리는 곳에 갔다. 암표상들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티켓! 티켓! 하며 소리쳤고 우린 한 암표상과 끈질긴 흥정 끝에 값싸게 경기장에 들어갔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압도적인 스케일,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며 흔들어대는 몸놀림! 이게 진짜 삼바구나! 설운도가 삼바~ 삼바~ 하며 부르는 노래는 전형적인 한국 노래였구나! 그곳엔 인종도, 나이도, 직업도, 가치관도 중요치 않았다. 삼바 축제는 이 모든 것을 뜨거운 열정 하나로 전부 녹여버렸다. 퍼레이드는 50분간 지속되고 10분 쉬는 형식이었는데 우린 세 번째까지 본 후 숙소로 돌아와 그대로 기절했다.
오전까지 여행 일정을 짜다가 오후에 배가 고파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미친 더위가 멱살을 잡고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이 더위에 길을 헤매는 일은 자살행위다. 무조건 가까운 식당에 가야 한다. 무조건! 그러나 그게 만만치 않았다. 브라질 시내, 그것도 빈민가에서 아이폰을 꺼내 느긋하게 구글 지도를 보면서 이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희미한 머리 속 기억을 의지해 식당을 찾아다녔다. 여긴 비싸고 여긴 맛없을 것 같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아내의 얼굴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이러다가는 길바닥에서 큰일이 날 것 같아 눈 앞에 보이는 현지인 식당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식당 안은 어두웠고, 느끼하고 시큼한 냄새가 콧구멍을 찔렀다. 손짓 발짓으로 대충 음식을 시키고 얼마 지나자 고무처럼 딱딱한 소고기와 후드득 떨어지는 밥이 나왔다. 아내는 호기 좋게 밥 한 숟가락을 떴지만 이내 속이 메스껍다고 하면서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했다.
치노! 치노! 치노! 치노!
왜 이렇게 시끄럽지? 누가 싸우나? 설마 날 부르는 건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는데 아내가 죽은 문어처럼 의자에 축 늘어져 있었다. 놀란 눈을 하고 그곳에 번개처럼 달려가 보니 한 흑인 여인이 아내의 손을 주물러주며 차가운 물로 아내의 얼굴을 연신 닦아주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엄마가 다정하게 아기를 달래는 것처럼 보였다. 난 그녀에게 대역 죄인처럼 정신없이 굽신거리며 오브리가도(감사합니다)를 중얼거렸다.
테이블로 돌아온 아내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아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괜찮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브라질에 입국한 지 3일 만에 맥없이 쓰러진 자신에 대해 새삼 놀라는 듯했다. 아내는 체력이 좋은 편이다. 연애시절 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일명 ABC) 등반했고 종종 10km 마라톤도 함께 완주했다. 그런데 아내는 유독 '더위'에 약했다. 브라질 날씨는 아내에게 치명적이었다.
난 독기 가득한 눈빛을 하고 목구멍에 음식을 집어넣었다. 내 접시에 있는 음식을 다 먹고 난 후에는 아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맛이 없더라도 먹어야 한다. 신물이 올라와도 목구멍으로 넘겨야 한다. 나까지 쓰러지면 안 된다. 껌처럼 질긴 소고기를 질겅질겅 씹다가 문득 앞에 앉아있는 아내를 봤는데 순간적으로 목구멍 밑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오면서 목이 콱 막혔다. 그리고 살짝 눈물이 핑 돌았다. 먹어야 한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 난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우적우적 씹으며 정신을 개조하고 다짐했다. 과거 달콤했던 여행과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연발했던 음식들은 잠시 잊자! 지금은 하루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게 가장 중요하다.
"순간적으로 눈 앞이 흐려지면서 앞이 안보이더라고. 그러더니 갑자기 손발이 저린 거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주저앉아 버렸는데 그 후로 기억이 나지 않아" 헉! 소리 나는 더운 날씨,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들, 의사소통의 어려움, 여행 일정의 스트레스까지 어는 것 하나 쉬운 것 없는 브라질. 리우는 우리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3일 만에 보란 듯이 아내를 먼저 녹다운시켰다. 다음은 나였다. 아이슬란드, 영국, 포르투갈 여행은 이곳 브라질과 비교하면 워밍업이자 맛보기였다. 이제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