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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화 Mar 18. 2024

화면은 인생의 제유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화면 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봄이 온 것인가 싶게 화창했던 날들 끝에 찾아온 주말은 황사로군요. 그럼에도 여쭈어 봅니다. 주말 잘 보내셨을까요.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잘 보내지 못했답니다. 이게 몇 년만인지도 모르게 아주 심하게 앓았습니다. 그나마 지금 이렇게 추스르고 앉아 답장을 쓸 수 있는 건, 제가 짧고 굵게(!) 앓는 체질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악독한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에도 저는 단 하루 만에 정상 컨디션을 회복하는 놀라운 면역력을 선보여서… 좋긴 뭘 좋았겠습니까, 조금 빨리 나았다고 함께 동시발병했던 가족들 뒤치다꺼리 제가 다 도맡아서 했죠. -_-


아무튼 어제는 이대로 이승을 하직하는 건가 싶었는데 웬걸… 오늘은 이럭저럭 일어나 앉아 책도 읽고 밥도 한 그릇 싹싹 비웠답니다. 덕분에! 마감 펑크라는 최악의 상황은 맞이하지 않게 되었군요. 천만다행입니다.


아니 그건 그렇고 말입니다.


새로운 원고 시작하시느라 바쁘시죠, 라니… 이게 무슨 유체이탈화법… 선생님 그 원고는 같이 작업하는 거 아니었던가요! 흐헝엉허헝.

네, 조금 마음이 부대끼기는 합니다만 늘 말씀드렸듯 저는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와 발등튀김을 사랑하는 1인. 그러므로 거뜬하다! 고는 말씀 못 드리지만 나름 즐기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지난주에 읽었던 책이 가짓수가 그리 많진 않은데, 무얼 얘기할까 고민하면서 쌓여있는 책더미를 보다가 일단 <장송의 프리렌>은 젖혀 두었습니다. 이건 너무 장르덕후미가 충만한 시리즈인지라, 흠흠. 이건 어떨까요? 《아이들의 화면 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신간입니다. 제목이 읽기에 따라서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해석 가능한 여지가 있지 않나 싶어요. 스마트폰을 어떤 방식으로 이용하는 어른이냐에 따라 저 제목을 달리 해석할 것 같습니다. '이러이러한 몹쓸 일들이 현재진행형이니 당장 스마트폰을 뺏어야 한다.', 혹은 '이용시간을 통제해야 한다.' 또는 '어차피 이것이 시대의 흐름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현실을 알고 조금이나마 나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는 쪽이 좋지 않겠는가.' 랄까요?


필화 님은 어느 쪽이실까요?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불과 몇 년 전까지는 '스마트폰은 절대로 아이들에게 허해서는 안 될 유해한 기기다.' 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쪽이었습니다. 지금은요? 박쥐예요. 이쪽 진영에 찬성표를 던졌다가, 또 저쪽을 힐끔거리다가. 하지만 예전만큼 강성 반대파는 아닌 것이, 이 안에서 자신만의 디지털 테라 terra를 만들어 나가고 현실 세계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어떤 종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실제 사례를 몇 번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세계 안에서는 현실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작은 연대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도요.


물론 아이들은 신체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도 덜 자라고 유약한 면이 없지 않아서 그런 약점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질 나쁜 범죄자들이 이곳에도 여기저기에 덫을 놓고 있긴 합니다. 그 밖에도 실제 건강에 미치는 유의미한 악영향들이 없지 않지요. 이런저런 현실적 근거들을 차곡차곡 가져다 쌓다 보면 다시 첨예한 논쟁이 기다리고 있는 질문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스마트폰은 도대체 이로운 점이 더 많은가, 해로운 점이 더 많은가?


그런데 저는 이런 질문이 유익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논쟁을 위한 질문은 별로예요. 대안을 찾기 위한 질문을 하는 쪽이 바람직하죠. 질문 설계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저는 아직은 사회에 제대로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추상적인 답변만 늘어놓는 사람을 탓하기 전에 질문자가 던진 말을 가만히 헤아려 보면 답변하는 사람이 절대로 애매하게 피해 갈 수 없을 정도로 예리하게 벼린 질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거든요.



이와 같은 화면의 근본적인 변화를 두고 인지과학자 데이비드 차머스는 이런 농담을 건넸다. “제 마인드는 한 30퍼센트쯤 구글, 20퍼센트쯤 애플로 구성돼 있습니다.” -55쪽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의 총합, 그 이상일 수 있다.’ 이것이 화면이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중요한 진실일 것이다. 이른 나이부터 내 화면을 갖고 내 세상을 고민하는 젊은 세대에게 화면은 드러나지 않은 나 자신을 드러내는, 그럼으로써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들에게 화면은 ‘나’라는 선명한 자의식과 적은 비용으로 여러 액션을 실행해 볼 수 있는 환경이며, 게임식으로 다져진 플레이 역량은 주변에 없는 관계도 찾아내 그로부터 ‘나’를 길어 올리는 작업으로 연계된다. -107쪽



유사한 맥락으로, 내면에 어떤 질문을 품고 있다는 것은 방향성을 잃지 않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느냐, 그저 되는대로 떠돌아다녀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마음의 상태가 항해와 표류를 가름하는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그것이 인생이든, 인터넷의 망망대해든 말이죠.


그럼 여기서 다시 원론적인 질문으로 돌아오죠.

그 질문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 것일까요?

누군가가 내게 계속 물어봐주면 좋겠지만, 자동인형도 아니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 리 없죠. 그러면, 스스로에게 지치지 않고 질문하게 하여 삶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끔 돕는 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얻어지는 걸까요. 오늘 제 편지글이 유난히 두서없었다면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컨디션 탓이려니 해 주시어요. 다음엔 평소의 명랑유쾌텐션짱짱 담화로 돌아올게요. 이러나저러나 필화 님은 무슨 책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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