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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지언니 Nov 03. 2020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건축학개론

건축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 이종건


방황하던 어느 해 가을
정독 도서관에서 읽은
이종건 작가님의 책 "인생 거울"



인생거울 책 제목 폰트는 링크가 깨졌을 때나 뜨는 폰트?같기도 하고 90년대 말에 사라졌을 법한 캐드 R14 폰트 같기도 해요. 책 속 화자는 건축 비평가에요. 책은  그의 인생 리모델링 매뉴얼?이랄까요. 대학에 들어간 이후 건축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을 얼마나 읽었을지 모르겠지만 적잖이 충격을 받은 책으로 난 죽었다 깨도 이렇게 솔직한.......이런 책을 이런 문장을 쓰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봐요. 그리고 내 안의 외로운 꼰대를 만난 듯한 부끄러움도 느꼈어요.


이렇게 만난 적 없는 작가를 아주 가끔 기억하던 올봄. 서점에서 비닐에 짱짱하게 싸인 이종건 작가님의 책을 봤어요. 그리고 바로 사서 훌훌 뜯어 읽었어요. 내용을 읽지 않고 책을 사는 경우는 드문데 너무 궁금했거든요. 이 책은 드디어 나의 좌뇌를 사용하면서 그동안의 나의 어쭙잖은 지식에 근거하여 읽어 내려갈 수 있었어요. 이제는 시간이 지났으니까 비닐까지 씌워 파는 책의 내용을 조금 소개할까 해요. 나누고 싶은 내용은 요즘 맥락 없이 꽂힌 내용이에요. 복붙한 문장의 행간을 알기 위해 책 보시길 추천드려요.




학교에서 배울 수 없고,
실무에서 논하지 않는



'집'을 뜻하는 접미사가 붙은 '건축가'는 화가, 조각가, 음악가, 작곡가, 사진가 등의 경우처럼 작품 생산을 통해 독자적 세계를 이루어가는 예술가를 뜻한다. 그리고 '사(士)' 곧 '선비'를 뜻하는 접미사가 붙은 '건축사'는 의사, 약사, 변호사 등의 경우처럼 국가가 구속하는 자격을 지닌 전문 비즈니스맨을 가리킨다. '건축가'는 작가인가 전문 비즈니스맨인가?



알베르티는 다음과 같은 사람을 건축가로 생각한다. 확실하고 대단한 이성과 방법으로써, 자신의 생각과 에너지를 통해 고안하는 법뿐 아니라 고상한 인간 욕구들에 가장 아름답게 따르는 모든 것, 그러니까 물체들의 무게의 결합과 볼륨의 운동감 등으로 구축하는 법 또한 아는 사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높고 가장 고상한 모든 전공영역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마땅히 가져야 한다. 그러할 때 그 사람이 건축가다.



건설업자가 지배하는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건물'과 건축가 영역에 속하는 '아이디어로서의 건물'을 분명히 구분한다.



건축가는 지성을 통해 창조하고 경험을 통해 인식하고 판단을 통해 선택하는 자다.



건축가의 의미와 가치는 오직 사회적 쓸모, 좀 더 정확히 말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 사회에 맞서든 수용적이든, 건축가의 프로젝트는 그 가치가 정확히 사회적 차원에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건물을 건축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건축이다.



건물과 문화가 건축을 생산한다.



건축 전문가는 건축만큼이나 생활세계의 변동과 구조를 두루두루 공부해야 한다. 생활세계를 제대로 알지 않고서는 거기에 건축적으로 개입할 방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건축가들은 지금 무엇을 만드는 지식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지만, 그것을 왜 그렇게 만드는지 생각하는 능력이 턱없이 약하다. 교육자들이 깊게 고민해야 할 문제다.



우리 건축사회에서는 건축잡업의 결과물인 건물을 '작품'으로 부르는 언사에 거리를 두는 건축가들이 있다. 김인철과 승효상이 대표적이다. 그와 달리, 자신이 만들어낸 건물을 스스럼없이 작품이라 부르는 건축가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설계한 건물을 다양한 매체에 소개하고, 그에 대해 글도 쓰고 강연도 하며, 그로써 각종 상을 받는 행위는 양쪽이 그리 다르지 않다. 전자가 후자와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작품'이라는 용어를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의 권리에 속하는, 더 정확히 말해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결과물에 가치를 부여할 때 쓰는 사회적 용어로 여긴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현존하는 최고령 현역 건축가 유걸은, 필자가 주도한 한 토론장에서 '역사적, 문화적, 도시 컨텍스트' 무용론을 설파했다. 컨텍스트를 무가치한 것으로 처분하는 그의 주장은, 당장은 적지 않은 건축 전문가들을 당황하게 하거나 분개하게 하지만, 컨텍스트를 금과옥조처럼 주창하는 건축가의 작업에서 컨텍스트의 희미한 파편도 읽기 어렵거나, 어렵게 찾아내어도 사소한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흔한 우리 건축의 현실을 생각하면, 적어도 절반의 진실은 담고 있다.



랭(Alexandre Lange)은 20세기 후반 건축 비평이 취한 접근들을 네 영역으로 나누어 제시한다. 첫 째, '형식적인 것'으로서 시각적인 것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건물 안팎을 거닐며 보는 것' 곧 건물 조직, 재료, 연결들을 중시한다. 둘째, '경험적인 것'으로서 건물의 느낌 곧 건축과 인간 간의 정서적 연관성을 중심에 둔다. 셋째는 '역사적인 것'으로서 특정 건물이 건축가의 건축적 이력을 형성하는 구조, 건축가 개인이 글로벌한 건축 지형 속에 점유하는 위치를 따진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 '행동주의'로서 건축행위로써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손해를 보는지, 곧 경제적이거나 사회적 견지에서 도시와 대중을 지키는 검사의 역할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판단의 틀은 이렇게 다양하다.



건축 작품을 판단하고자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기준들 간의 가치의 우열'에 대한 판단이라기보다 자신이 선택한 가치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뿐 아니라, 건물의 성격과 그것이 위치한 상황을 포함해 '지금 여기' 어떤 방식으로 절실한지, 그것을 현실과 대질시키는 일이다. 예컨대 단순히 아름다움이 아니라 '어떤'아름다움인지, 곧 오늘날 우리 상황에 가치 있는 아름다움의 방식 혹은 양상을 찾고 해명하는 작업이다.



흔히 실무가(건축가)와 이론가(비평가)를 선수와 관객으로 빗대는데, 적절한 비유다. 구체적인 삶의 활동인 실무는 당연히 삶의 현장에 속하지만, 판단행위는 거기서 어느 정도 초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실무는 초연할 수 없다거나, 판단 행위가 현실적이면 안된다는 것은 아니다. 경기장에서 경기를 펼치는 선수에 빗댈 수 있는 건축가 또한 이론의 견지에서 전략과 전술과 작전을 짜고, 경기를 관전하는 비평가 또한 추체험과 관찰과 상상을 통해 현실적 조건과 상황에 개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무가는 손을 더 쓰고 이론가는 머리를 더 쓰는 존재다. 따라서 전자는 후자로부터 머리를 배우고 후자는 전자로부터 손을 배우는 편이 사리에 맞다. 실무는 단 한 사람의 개인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반면, 이론은 오롯이 혼자 해야 하는 작업이다. 때때로 이루어지는 존중, 공감, 정직 등의 덕목에 기초한 소통은 양자 모두에게 이롭다.



이미지 사회는 건축을 위협한다. 건축을 이미지로 축소시킴으로써 '건축적인 것'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눈을 현혹하는 스펙터클한 건축은 건축을 표면 다루기보다 축소한다.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이나 개인 건물이 아니라, 공공선과 공익을 추구해야 하는 공공건축마저 화려한 외관에 쏠린다. 어마어마한 규모와 건설비, 그리고 무절제한 에너지 낭비 등은 오직 시민의 눈을 사로잡는 데 이용되는데, 이것은 디자인을 팔아야 하는 설계업체와 과시 행정과 정치적 치적에 몰두하는 정치가들의 사적인 욕심 탓이다.



건축은 대개 공간의 쓸모에 따라 가치를 획득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공간이 돈으로 환산되는 시장경제에 편입되어, '대항적 쓸모없음'의 쓸모처럼 '돈으로 살 수 없는 성분'을 전혀 확보하지 않을 때, 한 마디로 사고파는 상품에 그칠 때, 그것은 건축 작품이 아니라 부동산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도정일이 쓴 다음 문장은 , '문학'이라는 낱말을 '건축'으로 바꿀 때 건축 작품의 본질이 손색없이 나타난다. "문학(건축)은 시장 안에 있다. 그러나 문학(건축)은 시장 이상의 것이다. 이 '시장 이상의 것'이 바로 문학(건축)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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