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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효진 Jun 22. 2020

어이쿠야, 40대가 중년이라고?

60이 되어도 같은 마음이겠지만

 오랜만에 페이스북에 친구의 소식이 올라왔다.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여행을 다녀온 사진이었다. '좋아요'를 눌렀다. 아이들이 엄마를 닮아서 정말 예쁘다는 칭찬댓글도 달아주었다. 다른 친구는 자기 사업 홍보 욕심에 대개 대표들이 하는 다소 과장스러운 사진을 올렸다. 댓글로 '제발 넣어둬'라고 해줬다. 그래도 그 사업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나중에 강화에 그녀석 화문석 팔아줘야 하는데... 하고선 벌써 몇년째다.  

 어제는 TV를 보다가 정말 충격적인 문구를 보고야 말았다. '40대 중년을 위한...' 대체 어떤 점에서 40대가 중년이라고 하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아이가 이제 다섯살이고 아직 해야 할일이 백만개도 더 있고, 친구들과는 어린아이들만큼은 아니어도 유행에 뒤처질만큼도 아니며 최근 방송에서도 40대는 주류에 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도 그렇고 '놀면 뭐하니'의 싹쓰리를 보아도 40대는 뉴트로의 원주민이고 핵심 타깃이다. 대세중의 대세이고 주류라는 말이다.

 마흔 된지 몇달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십대가 어쩌구저쩌구 하면 욱하는 느낌이 올라오기 일쑤다. 대학 입학한지 이십년이 지나버렸고 결혼 일찍했다면 이미 아이들은 주민등록증이 나왔을 나이가 된 것도 같지만 그래도 아직 중년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 서른 다섯살 이후 급격한 호르몬 변화로 노화가 온다느니 하는 뉴스도 정말 듣기 싫다. 그래서 먹는 콜라겐을 검색해본 적은 있어도 아직 그런 것에 기대고 싶지는 않다.                                                                   

 마흔은 과연 불혹일까. 사춘기마냥 하루하루가 새롭고 지루한 일상이 싫다고 박차고 나오는 마흔일 뿐인데 말이다. 대학시절 강의실의 열띤 토론이나 밤을 새워 시험공부하던 그 초여름밤의 풀벌레 소리나 첫 직장 출근날의 이미지가 이렇게 또렷한데 벌써 중년이라니. 중년은 청년이 아니고 그래서 청춘도 아니라는 말처럼 들려서, 아직도 싱그럽고 통통튀는 기회의 시기를 지나 이미 자기 삶을 완성했다는 말같아서 욱하는 것일테다. 인생이 60부터라는 고리타분한 말은 빼두더라도 예순이 지난 엄마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하는 게 어색했는데 40대가 중년이라니.

 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었던 때도 있고, 얼른 졸업해서 안정적인 삶을 갖기를 원했던 적도 있다. 쓸데 없어 보이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고 객기나 자존심으로 버티지 못하고 부러진 경험도 있다. 하지만 조금은 유연해지고 뿌리를 찾았으며 나보다 주변을 살피는 일이 많아진 지금의 삶은 더 파릇하고 생기 발랄해야 한다. 그러므로 라떼나 들고 무게나 잡고 '중'압감을 견뎌야 하는 '중'년이 아니란 말을 하고 싶다.

 좀 더 바지런히 재밌게 살아야겠다. 정말 나중에 멋진 중년이 되려면 아직 나는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걸 이번 참에 깨닳았다. 부지런하고 보람있게 살아서 이십년쯤 지나서는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인정할 줄 알고 그러면서도 당당할 줄 아는 중년이 되고 싶다. 나는 아직 부끄럽게도 다른 사람보다 내가 중요하고 내가 못난 것을 인정하기 싫으며 매일매일 반성할 것 투성이인 사람이란말이다.



비로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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