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미용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11화)
설아의 긴 고백은 사랑이었다. 성태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뒷받침되어야 할 수 있었던 그녀의 이야기. 그들이 행복한 시간에 빠져 있을 무렵, '인생 미용실' 앞에는 한 남자가 서성이고 있었다.
"이름 한 번 유치하네."
그 남자는 못마땅한 듯 간판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문을 벌컥 열었다. 역시나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와 반짝이는 샹들리에, 다양한 그림의 액자가 펼쳐졌다. 남자는 심란해 보였다. 어두운 표정의 그가 그곳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을 때, 샹들리에 불빛들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한동안 잠잠하시더니, 왜 또 오셨을까~ 이번엔 꽤 젊은 얼굴이네?"
남자를 마주한 루나는 놀람도 잠시, 갑작스레 등장한 그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는 그대로 루나를 지나쳐 포르투나의 수레바퀴 그림이 그려진 액자 앞에서 발을 멈췄고, 그녀의 빈정거림은 허공에 맴돌았다.
그는 그림만을 응시한 채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번에는 여기저기 너무 티 내더라. 명함보고 안 올 수가 있어야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시선을 두는 그의 목소리와 눈빛이 단호했다.
루나는 안경을 만지작 거렸다. 그녀는 그와 가깝다 느껴져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넓혔고, 안정적인 위치에서 다시 입을 뗐다.
"아니.. 다 자기가 잘나서 잘 되는 줄 알더라고. 그건 좀 별로잖아. 세상 돌아가는 건 전부 신의 계획이고, 우연찮게 일어난 행운은 다 내 덕인데 말이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하던 루나는 고개를 올려 남자에게 어깨를 쓱 올려 눈짓 한 번, 자신의 가슴 한 번을 순서대로 퉁퉁 쳐댔다.
"난 인간사에 개입은 안 해. 그들이 하는 선택을 지켜볼 뿐이지."
루나는 그의 말에 가소로운지 콧방귀를 뀌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사 개입 안 하시는 분이.. 벌써 몇 년 전이야, 22년 즈음.. 됐나? 초등학생 꼬맹이 구하겠다고 차에 타고 있던 여자를 죽였지 아마?"
그녀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남자의 심기를 건드렸다.
"어차피 죽을 여자였어, 마지막 모습만 조금 바뀌었을 뿐... 살아갈 날 많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갈 필요는 없으니까.
그는 조금 높아진 언성으로 그녀만을 응시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남자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내가 널 찾아온 이유는 하나야. 이쯤에서 그만하고 떠나."
그가 떠나라는 말을 하기가 무섭게 손뼉이 맞닿는 소리가 남자의 말을 끊었다.
"와! 그러고 보니 지금 모습이.. 딱 그때 그 꼬맹이네! 아.. 설마 그래서 최성태 옆에 있는 거야? 미안해서? 나 누군지 알아... 차 사고로 죽은 여자."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뼉까지 쳐가며 이야기하는 루나의 행동에 더욱더 고요해지고 있던 찰나, 복도 저 멀리서부터 조명 터지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거울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상황이 재미있는지 남자를 힐끗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그 여자, 최성태 엄마잖아."
그녀의 말을 끝으로 이내 유리가 쩍쩍 갈라졌다. 갈라져가는 거울 속으로 어렴풋이 루나와 남자가 비췄고, 그곳엔 성태의 하나뿐인 친구가 있었다.
신은 어느 곳에 나 존재했다. 어떤 날에는 꽃집 사장, 어떤 날에는 옆집 아저씨. 여러 얼굴로 인간들의 옆에서 친숙한 모습으로 그들을 보살펴왔다.
시간을 거슬러 22년 전 3월.
초등학교의 입학식이었다. 성태의 엄마는 오랜 병원 생활을 하던 중, 앞으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아들의 입학식을 보기 위해 외출증을 끊고 학교로 향했다.
그날 저녁은 그녀의 생이 끝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병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잠이든 채 평온하게... 하지만, 그녀가 한 선택은 아들이었고, 그 선택으로 신의 개입이 생겨버리고 만 것이다.
상황은 이러했다. 남편 중호와 차를 타고 학교 앞에 다 달라서 신호에 걸려있던 중, 길을 건너는 초등학생 남자아이에게 음주운전 차량 한 대가 달려왔다. 건너편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며 이를 지켜보던 신은, 아이의 죽음이 예견되지 않았음을 알기에 처음으로 인간사에 개입을 하게 된다. 차량은 그대로 꺾어 성태의 엄마에게로 향했고 그 모습이,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일어난 신의 개입은 한 가정의 괴로움으로 남게 되었다. 신은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의 희생으로 죽음을 면한 초등학생 아이에게 머물며 아들인 성태의 곁을 지금까지 지켜왔었다. 성태가 요행만을 바라며 철없이 지낼 때에도, 아빠의 사고로 힘들어할 때에도 늘 친구란 이름으로 옆에 있어주었다.
그래서인지,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의 손에 쥐락펴락 당하고 있는 성태의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포르투나 행운의 끝은 그녀만 알 수 있기에.. 신도 불안이란 걸 느꼈다.
잔뜩 화가 난 신의 행동에 루나는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그녀는 양팔을 감싸 겨드랑이에 끼어 넣고 한껏 김 빠진 얼굴로 말했다.
"워워- 가라앉혀. 안 그래도 재미없었어~ 인간이면 인간답게 탐욕에, 명예도 바라고 해야 하는데 마음속이 꽃밭이야. 일자리 없고, 여자 없고, 철도 없고, 매주 복권 꼬박꼬박 하길래 기대했는데.. 그냥저냥 아빠랑 행복하게 사는 게 오로지 꿈인 애야. 걔에 대해선 나보다 더 잘 알겠네."
루나는 성태와의 지난날을 회상하며, 재미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신은 그녀가 느낀 성태라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 동의하고 인정했다. 그러고는 흐뭇해졌는지 금세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신의 표정에 장난기가 발동한 그녀는, 눈을 찡긋거리고 제안을 한 가지 한다.
"근데.. 그냥 가기 아쉽잖아. 성태 평생소원이 뭐야~ 큰돈 한번 만지는 거잖아. 그거 한번 시켜주고 가야지."
미심쩍었지만, 아무리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행운의 여신이 하고자 마음먹은 일에 더 이상 관여할 수는 없었다. 신은 어쩔 도리 없이, 그녀에게 마지막이라는 약속을 받아내고 발길을 돌렸다.
"꼭 복권당첨으로 큰돈 만지라는 법은 없잖아?"
루나는 사라지는 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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